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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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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그 끈을 놓다 1-3


BY 푸른배경 2003-10-08

  프리젠테이션 동안 모든 광고기획안이 좋다고 떨어졌지만, 카피는 조금 수정을 요구하였기에 내일까지 마무리 짓기로 하고 청담동을 향해 차를 몰았다.
  가을의 어둠은 짙었지만, 도시의 밤이 그러하듯 창밖으로는 네온사인과 가로등이 즐비하였고, 영동대교를 건너는 체원의 차에서는 언제나 즐겨듣는 Bee Gees의 Don't Forget To Remember가 흐르고 있다.

  당신이 떠났다는 사실을
  내 가슴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이라고 자신에게 계속 얘기 했지만…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나를 잊지 말아주오
  그 사랑의 날들도
  나는 아직도 당신을 기억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별들에게 얘기 할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를 잊지 말아주오
  내 사랑이여
  벽에는 당신의 사진이 아직도 걸려 있습니다
  잊으려고 애도 써보았지만
  그때마다 가슴속에 되살아나는 당신
  똑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대여 나에게 힘을 주십시오

  주차요원에게 자동차 키를 맡기고 시계를 보니 8시 10분. 늦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바빠졌다.
  "아버지. 오래 기다리셨나요? 죄송해요."
  "응. 괜찮다. 나도 지금 막 온걸. 그리고 서울 교통이라는 게...."
  "제가 늦었으니 오늘은 제가 대접을 해드릴께요."
  "그럼 오늘도 아비 주머니를 털려고 했냐? 하하하하하하"
  한정식 집인 '솔가'는 내부장식이 고풍스런 분위기었고, 복도에 놓인 고가구에서 젊은 이들이 취향과는 좀 어울리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의 10년 당골집이기에 채원에게는 익숙하고 정겨운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보자고 하시고?"
  "이 놈아. 아비가 자식보자는 데, 무슨 일이 있어야 하냐. 그냥 오랜만에 식사나 같이 할까 해서지."
  방안으로 상이 들여졌고, 식사와 반주를 곁들이며 부자간의 대화는 다정하게 흘러갔다. 식사를 마치고, 간단하게 2차를 솔가 옆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카페에서 양주 한 병과 과일을 시킨 후 아버지는 종업원에게 음악소리를 좀 줄여달라고 말을 한 후 건배를 하자고 제의했다.
  "오늘 보자고 한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네."
  "너 사귀는 친구 있다면서?"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김 박사가 말해주더구나. 김 박사와 병원에서 만났다면서."
  "아하. 그러셨구나."
   그 말은 끝낸 후 아버지의 표정은 밝지 않다. 마주하고 있는 채원의 얼굴도 밝지만은 않다.
  "김 박사 말에 의하면 그 친구는 좋지않은 상태라고 하더구나. 더구나 심장을 이식받지 못하면 한 달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채원은 깜짝 놀라며 입으로 다가가던 술잔을 멈칫 놓칠뻔 하였다가 상 위에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
  소영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찾아올지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속으로는 애를 태웠다. 하지만 아버지 앞이라서 그런지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그 놓았던 잔을 들어 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야? 너에게 상처가 될까봐 그러지. 예전에 희순가 희수인가 그 친구도 그 병으로 죽지 않았냐? 넌 너무 힘들어 했고. 아비 마음은 그 친구가 떠나기 전에 정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이 드는 구나!"
  채원은 연거푸 술을 마시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저도 그럴 생각이예요. 사랑하던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본 것은 한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정리할려고 그 날도 갔다가 아저씨를 뵙게 된거였거든요."
  심각했던 아버지의 표정이 순간 밝아지면서 채원의 술잔에 다시 술을 채워준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괜히 니 엄마와 나는 그 말을 듣고서 얼마나 걱정을 했는 지."
  "염려 놓으세요. 저도 이제 어른인걸요. 내일은 카피 수정분이 있어서 안되고, 모레쯤 찾아가서 말할려고 하거든요."
  "너무 마음에 상처주는 말로 헤어지지는 말고. 얼마 남지도 않았는 데"
  "네. 제가 알아서 할께요."
  채원은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야광의 북두칠성이 붙은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창 밖으로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고, 시계의 초침 소리에 맞추어 채원의 눈은 깜빡거렸다.
  소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인실의 병실에 누워 채원이 붙여 준 야광의 북두칠성을 보고 있었다.
  "그건 뭐야?"
  "응. 저번에 종로에 나갔다가 사왔어. 내 방에도 이 것을 붙여 두웠거든. 내가 이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너도 바라보고 있으라고. 별똥에게 소원을 빌 듯 너의 병이 빨리 낳기를 매일 기도할려고. 너도 매일 빨리 퇴원하기를 기도해야되?"
  "알았어. 자기 때문에 빨리 회복해야 되겠는 걸."
  둘은 까르륵 웃었지만 둘의 속은 얼굴에 보이는 것만큼 편하지는 않았다.
  채원은 아버지의 말에 더욱 생각이 깊어졌다. 소영이의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버지의 말처럼 그렇게 짧을 줄은 몰랐다.
  '한 달이라.... 한달.'
  침대에서 일어나 달력 앞으로 가서 지금으로부터 한달 딱 10월 29일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넣었다. 그리고는 그 밑에 안녕이라는 작은 글도 함께 남겼다.
  '왜, 나의 인연은 이렇게 짧은 거야. 희수와도 그랬고, 아니 희수는 잊자. 이미 떠난 녀석을 생각해봤자 소용없는 데. 지금은 소영만 생각하자. 그래, 그 놈도 그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떠나겠지.'
  주루륵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입술을 움직여 작게 소리내었다.
  "don't for get to remember me my 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