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827

그 사랑 - 15


BY 선물 2003-10-27

<그 후... 선주>

"어머! 이 집은 너무 넓어 보인다. 대체 어디 어디 튼 거예요?"
큼직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후덕한 인상의 중년 아주머니가 선주를 보면서 부러운 듯이 말을 건넨다.
"특별히 튼 곳은 없구요. 그냥 장식장을 없애고 도배랑 페인트를 흰 색으로 통일시켰더니 한결 넓어 보이네요."
"어머, 그렇게만 해도 너무 근사하다. 정말 집 이쁘게 잘 고쳤네."
집이 예쁘다는 아주머니의 칭찬에 선주는 기분이 좋아진다.
"감사합니다."
몇 달 전 이 아파트로 이사한 선주는 새로 이사한 집을 찾아 다니면서 반상회를 여는 이 아파트의 풍습 때문에 아직 익숙해 지지도 않은 손님들을 치르느라 제법 분주하였다. 이웃 아주머니들은 안방이며 부엌이며 욕실 등 새로 개조한 곳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때문에 집안은 몹시 수선스러워졌다. 그 때 한 아주머니가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 섰다.
"아니, 도대체 902호에 누가 살고 있었어요? 세상에나 그렇게 싼 값에 집을 내 놓으면 어떡한대요? 저 옆에 고운 아파트는 서로 똘똘 뭉쳐서 집 값 올리느라 절대로 싼 값에 집을 못 내놓게 한다는데 우리도 그래야 되는 것 아니에요?"
"902호? 그럼 노총각 혼자 사는 집이잖아!"
"아, 그 집 총각이 얼마 뒤에 결혼 한다네요. 그래서 집을 내 놓았어요."
역시 동네 사정에 도통한 앞 집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아하! 드디어 그 잘 생긴 총각이 장가를 가는구나! 그나 저나 난 이제 어째? 그 총각 잘 생긴 얼굴 몰래 몰래 훔쳐 보는 낙으로 살았는데... 이제 그 낙도 없음 난 어떡해!"
아주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한 아주머니의 걸쭉한 입담이 그렇게도 재미난 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집안을 한 바탕 뒤 흔들어 놓았다.
"아유, 내가 정말 못 살아. 못 살아. 저 아줌마 저러다 아저씨한테 쫓겨나고 말지."
또 다른 아주머니의 맞장구로 다시 한 번 선주의 집안은 웃음으로 물결친다.
"근데, 대체 어떤 처자길래 그렇게 눈 높은 총각의 맘을 뺏은 거래요?"
역시 앞 집 아주머니를 향해 누군가가 그 궁금한 내막을 물어 보았다.
"뭐라더라, 정확한 것은 모르겠고...어쨌든 미술하는 여자라고 했어요. 불란서 유학까지 하고 왔다는데 글쎄 신문에도 종종 이름이 나고 그러는 여자래요. 그 총각 어머니가 유명한 화랑을 경영하시잖아요."
"아유, 잘 됐네. 그래도 그 나이치고는 정말 장가 잘 가네."
"아유, 말이라고 해요? 남자는 아무리 나이 들어도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새파랗고 예쁜 여자 골라서 장가 간대잖아요."
"그나 저나 집은 얼마에 내 놓았대요?"
다시 집 값으로 이야기가 돌아 오자 반장 아주머니조차 반상회를 진행할 생각은 않은 채 그 이야기에만 열을 올렸다. 선주는 야쿠르트 병에 스트로를 꽂아 새로 들어 오시는 분들께 대접하고는 잠시 식탁 의자로 가서 앉았다.

얼마 전 캐나다에 있는 아련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 좀 맘에 걸려 왔다. 우석이 아련이를 못 잊어 여태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소문이 난 것을 말하면서 기가 막힌다고 하자 그래도 옛 정이 남아 있는 건지 아련은 좀 불편한 기색을 보였던 것이다. 선주는 아련이를 그렇게 배신한 우석을 정말 싫어 했다. 이제 조건 좋은 여자랑 결혼 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선주는 더 속이 상하고 만다. 얼마 전에 그런 소식을 전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기왕 우석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으니 결혼 소식까지는 전해주는 것이 제대로 마무리 짓게 해 주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굳이 여자의 조건 같은 것을 말해서 아련을 불편하게 하진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그 때였다.
"새 댁,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 불러도 모르게?"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며 아는 체를 하고 지내던 아주머니셨다.
"아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래도 인사는 정식으로 한 번 하라고 그러는 거야. 참, 그리고 조카 딸 아인 안 보이네? 학원에 갔나?"
그 순간 웅성거림이 일제히 멈추고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선주에게로 쏠렸다.
`자기들끼리 이미 이런 저런 말 다 하고 다니면서 꼭 이렇게 공식적으로 날 난처하게 해야 하나?'
선주는 잠시 딸아이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원망스런 맘이 되고 만다.
"조카 딸이라뇨? 걘 제 딸 아이인데요."
선주는 또렷한 목소리로 힘을 주며 분명하게 말했다.
"애걔! 나이가 몇 살인데 중 3딸이 있어?"
그러나 누군가가 그렇게 되 묻는 아주머니를 옆에서 쿡하고 찌르자 다른 아주머니들도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리려고 애를 썼다.
선주는 곁에 앉아 있던 앞 집 아주머니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속으로 `아이고, 두야' 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