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 - 5>
아련이 가고 난 뒤 도준은 멍하니 앉아 있는 선주를 일으켜 소파 위에 앉혔다. 그리고 내동댕이 쳐진 보온 병을 들어 제 자리에 갖다 놓았다. 가끔씩 도준을 위해 사용했던 보온 병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잠시 목젖이 뜨거워 오는 것만 같았다. 지금 선주가 느끼고 있을 비참함이 고스란히 자신에게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주로 하여금 차마 겪어서는 안 될 일들을 겪게 만든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먹먹한 가슴이 되고 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 곳만을 응시하는 선주의 눈길은 그저 허공을 휘이휘이 헛손질 하는 사람처럼 넋이 빠져 보였다. 도준은 그 상태의 고요를 깨기가 두려워졌다. 하지만 자신의 두려움조차 너무도 비굴하게 보였다.
도준은 선주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무릎 꿇고 앉았다.
"선주야..."
그러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더 이상은 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선주는 온통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도준을 바라 보았다. 이른 새벽부터 자신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해서 신나게 달려 왔을 선주였다.
"내 입이 열 개라도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어. 그저 발가벗은 심정으로 네 앞에 서서 변명도, 거짓도 아닌 진실한 마음으로 있을 뿐이야. 하지만 그것조차 너에게 아픔이 될 까 싶어 너무 괴롭다."
도준의 목소리는 점점 꺼질 듯 가라 앉았다.
"언제부터 제 걱정을 그렇게 한 건데요? 그리고 이미 진실은 다 알아 버렸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한 거죠? 결국은 변명하려는 거, 다 알아요.그렇게 해야 오빠 맘이 편해질테니까..."
선주는 다시 발끈하며 가시 돋친 음성으로 도준을 쏘아 붙였다.
"그래...어떤 비난이라도 다 받아 들일 거야. 네 맘만 편해질 수 있다면..."
"그만! 제발 그런 역겨운 말일랑 그만 하라구요! 날 위하는 척, 안타까워 하는 척 그러는 거 견딜 수가 없어요. 두 사람 모두 제 생각을 해 주는 것처럼 그러는데...진짜 역겨워.더러워."
"아련씬 잘못이 없..."
도준은 자신이 하려던 말을 멈추면서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미 선주는 싸늘한 얼굴이 되고 만다.
"흥! 정말 대단한 사랑을 하고 있군! 그 동안 어떻게 그런 마음을 참아 온 거지? 참 대단하네요."
선주는 자리를 박차며 일어 났다.
"조금만 더 얘기 하자.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일어 서려는 선주를 붙들어 앉히며 도준은 말을 계속 이어 갔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어.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어. 맹세코 의도 했던 일이 아니었다구! 사실 그 동안 아련씨한테 갖고 있었던 감정이란 건 동정이나 연민같은 그런 감정일 뿐이었어. 그런데 그게 또 다른 감정으로 연결 되고 말았던 거야. 애틋하게만 느껴 왔던 것이 결국...."
"아련이에 대한 동정? 왜요? 아련이가 왜? 그럼 저는요. 아련인 가난이란 것만 빼면 제가 갖고 있지 않은 모든 것을 다 가졌어요. 엄마도 있고 잘 따라 주는 동생들도 있고...서로를 위해 주는 그런 소중한 가족이란 게 아련이에겐 있어요. 전 아무도 없어요. 아버지 조차 상처만 주고 마음을 열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인데...그런데 왜 제겐 그런 연민이 없었나요? 그러니 그건 말도 안 돼요. 차라리 처음부터 사랑했었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떳떳할 거예요."
선주의 눈에서는 다시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선주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이 늘 있었어. 그런데... 그래, 다 말할게. 너를 보면서는 동생처럼 그런 감정으로 가깝게 생각 되었을 뿐이야! 하지만 아련씬 아니었어. 자꾸만 운명같은 것이 느껴졌어."
그 순간 선주는 놀란 눈빛을 하면서 한 손을 내 젓는다.
"잠깐만요. 오빠, 잠깐만..."
선주는 앞에 놓인 휴지를 꺼내 눈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닦아 낸다. 그리고는 길게 숨을 내 쉬었다.
"됐어요. 그거였어요. 이제 들을 이야긴 다 들었어요. 저 갈게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어요. 절대 따라 나오지 말아요. 그리고 절대 제게 연락 말아요. 절대로!"
선주는 너무도 단호한 어투로 도준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는 휘청이듯 오피스텔을 빠져 나갔다.
<아련 - 7>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선주를 만날 길이 없었다. 그 날 오후에도 회사에 나오지 않아 걱정했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는 선주가 사표를 냈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었다.아예 도준과 자신을 보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아련은 요 며칠 심한 자책감으로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면의 밤을 보내는 것은 도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았다. 가끔 도준에게서 연락이 왔지만 아련은 차마 만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선주에게 더 이상 죄짓는 일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준은 아련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아련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어 만남을 굳이 강요하지는 않았다.
우석과의 연락이 끊어진 지도 보름을 훌쩍 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련은 그의 연락이 기다려지지도 않았고 그의 소식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우석 또한 그런 심정인지 마찬가지로 연락이 없었다.그 동안 우석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오래 된 꿈처럼 느껴졌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과 함께 쌓인 견고한 사랑이었는데 한 순간에 모래 성으로 변해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새롭게 싹트기 시작한 도준과의 사랑도 어느 순간에 사라져 버릴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감정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사랑은 시작 되었고 좀 더 자유로운 사랑을 위해 잠시 미뤄 두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