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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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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 - 11


BY 선물 2003-10-21

<선주 - 5>

 

선주는 지난 밤에 씻어 놓은 보온 병 2개를 나란히 식탁 위에 올려 놓고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는 전복 죽을 퍼 담았다. 다지듯 썰어 놓은 전복을 참기름에 다글 다글 볶다가 닭을 고아 우려 낸 국물을 부어 끓인 전복 죽은 갈아 넣은 찹쌀의 윤기와 더불어 파르스름한 빛깔을 띠는 것이 한 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지난 밤에 병원에 내어 가고 남은 것으로 아버지 몫을 담아 놓고 보니 아련과 도준에게 줄 양만 간신히 남게 되었다. 선주의 입에도 잠시 군침이 돌았지만 자신이 좋아 하는 사람에게 맛있는 것을 해 줄 수 있다는 뿌듯함에 행복함을 느끼며 그저 한 술 맛만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는 도준이 출근 하기 전에 아침식사로 먹을 수 있게 하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선주는 새벽부터 서둘렀던 덕분인지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도준의 오피스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나기에는 너무나 이른 시간이었다. 미리 전화를 하고 오려다가 도준에게 깜짝 쇼를 보여 줄 요량으로 연락 없이 왔던 것인데 막상 벨을 누르려고 하니 적잖이 당황할 도준의 모습이 조금은 부담스러워 진 것이다. 하지만 밖에서 기다리고 있기에도 난감해진 선주는 조심스레 용기를 내어 벨을 눌렀다.

"도준씨?"
그런데 뜻 밖에도 안에서 문을 열어 준 사람은 도준이 아닌 아련이었다. 순간 선주는 놀라움에 감전이라도 된 듯 온 몸의 전율을 느꼈다.
"선주야!"
"아련아!"
두 사람은 잠시 할 말을 잊은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선주야... 놀라지 마. 내가 설명할 게. 그러니 들어 와서...놀라지 말고 내 말을 들어 줘. 응?"
선주는 쩔쩔매면서 놀라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 하는 아련을 보니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설명? 무슨 설명? 그래,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이 시간에 네가 이 곳에 있어야 했던 이유를...내가 놀라지 않도록 그렇게 설명해 달라구. 응?"
나직하지만 선주의 음성은 싸늘하다 못해 아련의 온 몸을 얼어 붙게 할 만큼 차고 냉랭했다.
"실은 그저께 네가 도준씨한테 연락을 해서 도준씨가 집으로 왔었어. 그 때 난 쓰러져서 거의 정신을 잃은 채였고..."
아련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선주의 표정을 살폈다.
"계속 해."
선주는 단호하게 명령하듯 아련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도준씨가 날 병원으로 데리고 갔던 거야. 그리고...응급실에 갔다가 나 혼자 집에 있게 하기가 맘에 걸려서 그냥 이 곳으로 날 데려 왔던 거고..."
"근데 너 어제 날 만나서는 왜 그런 얘길 안 했던 거지? 뭔가 숨기고 싶었던 일이라도 있었던 거 아니니?"
"아니, 아니야. 하지만 둘이서 함께 밤을 보냈다고 하면 네가 괜한 신경을 쓰게 될 것 같아서...그래서 아무 말 않았던 거야."
그 순간 선주의 눈빛은 더욱 날카로와지며 마치 취조실에서 죄를 캐 묻는 형사처럼 그렇게 아련을 다그쳤다.
"그래? 그럼 어제도 네가 쓰러졌니? 어제도 병원에 갔다가 이리로 온 거였어? 그런 거였냐구?"
아련은 숨이 멎는 듯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선주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마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왜 대답을 못하고 있니? 뭐라고 대답 좀 해 보라구? 응?"
그 순간 문이 열리면서 빵과 우유 등 아침거리가 든 비닐 백을 들고 도준이 들어 왔다. 도준을 보자 선주는 들고 있던 보온 병을 내동댕이 치며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더 나빠! 지금 둘 다 내게 얼마나 잔인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거냐고!"
몸부림치듯 울부짖는 선주를 본 도준은 우선 진정시키기 위해 선주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야! 더러워. 더러워 죽겠어!"
거센 힘으로 도준을 밀어 붙이는 선주를 도준은 뒤에서 안듯이 제지하였다.
"우선 앉아 봐. 내가 다 얘기할 테니 우선 진정하고 앉아 보라구!"
"설명? 흥, 변명이겠지. 무슨 변명을 하려고 날 붙잡는 거지?"
이미 반은 이성을 잃은 것처럼 선주의 눈은 많이 풀어져 있었다.
그리고는 주저 앉더니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제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얘기 해 줘. 그렇게만 해 줌...내 무릎 꿇고 감사 드릴게...그렇게만 해 달라고...제발."
선주의 울먹임 속에 간간이 섞여 나오는 말은 그대로 바늘이 되어 아련과 도준의 가슴에 아프게 박혀 왔다.

<아련 - 6>

아련은 선주의 아픔 이상으로 마음이 아파 왔다. 뭐라고 변명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항상 자신을 위해 베풀어 주었던 선주에게 지금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지 마치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사실 지난 밤 내내 아련은 한 순간도 편안한 마음인 적이 없었다. 도준 또한 내색은 않았어도 언뜻언뜻 어두운 얼굴빛을 한 것으로 보아 아련과 마찬가지 마음이었던 것 같았다. 지금 눈 앞에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주저 앉아 있는 선주를 보며 아련은 정말 가까이 가서 손이라도 만져 보고 싶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을 되돌려 놓고 선주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박제처럼 꼼짝없이 서 있는 수 밖에는 더 이상 선주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던 것이다.

"아련씨, 먼저 출근하세요. 선주는 제가 나중에 데려다 줄게요."
잠깐 동안의 침묵을 깨고 도준은 아련에게 먼저 갈 것을 권하였다. 그제서야 아련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절규하는 선주의 모습을 그림자처럼 등에 업은 채 그렇게 무겁게 오피스텔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