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 - 3 >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도준의 발에 힘이 실린다. 자꾸만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지난 번 선주가 다녀간 뒤로 연락이 없어 안 그래도 선주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였는데 마침 선주가 전화를 한 것이다. 오랜만에 듣게 된 선주의 음성은 무척 반가웠다. 그러나 선주는 그 때의 어색함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말까지 더듬거리는 것 같았다.아버지 집에 있다는 선주는 갑자기 우석과 아련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아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얼마 전 아련이 우석을 만나고 온 뒤로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상심에 빠져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준은 그 날 오피스텔로 찾아 온 우석의 이야기만 간단하게 해 주고 자신도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고 답해 주었다. 선주는 도준에게 아련이 많이 걱정 된다면서 우석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 뭔가 두 사람 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 있는지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였다. 도준 또한 우석과 그 날 그렇게 헤어진 뒤로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궁금함을 갖고 있었지만 우석 스스로가 먼저 마음을 열어 이야기 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아련이 의외로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함을느낄 수 있었다.
도준은 우석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와 통화 중인지 얼마간 통화 중 신호음만 들을 수 있었다. 잠시 기다린 뒤 다시 연락을 해 보니 우석이 직접 전화를 받는다. 우석은 착 가라 앉은 음성이었다.
"나, 도준이야."
"응..."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
"그냥...그렇지, 뭐.."
"아련씨와는 어떻게 잘 해결 되었니?"
"도준아, 나 아직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가 않다. 미안하다. 별로 해 줄 말이 없어서...참, 그리고 그 날 일은 정말 미안했어."
"이 자식, 별 소릴 다 하고 그래! 참, 선주가 그러는데 아련씨가 많이 힘들어 한다는데...알고 있었니?"
"도준아,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 하자. 사실 나 요즘 많이 바쁘거든..."
우석은 도준의 전화를 몹시 부담스럽게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 알았다. 다음에 보자."
더 이상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고 캐 물을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꾸 아련이 걱정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도준은 자신의 마음이 계속 요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도준은 다시 전화기를 들어 아련에게 연락해 보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신호음에도 아련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도준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차를 몰아 아련의 집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집 앞에서 아련의 벨을 아무리 눌러도 아무런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주인 집으로 연결된 벨을 눌러 집으로 들어 간 도준은 아련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고 조심스레 아련을 불러 보았다. 하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다. 살며시 문을 열어 본 도준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아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불길한 생각이 든 도준은 아련을 정신없이 흔들어 깨웠다. 그제서야 맥없이 축 처져 있던 아련이 지친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이었다. 도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련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입술은 바짝 타 들어 가는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정신없이 아련을 들쳐 업은 도준은 가까스로 차를 몰아 인근 병원 응급실로 갈 수 있었다. 아련은 삭정이처럼 야윈 모습으로 오한이 난 듯 계속 떨고 있었고 그 모습을 지켜 보는 도준은 측은함에 가슴이 아렸다. 그리고 아련을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우석에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도준은 그동안 이렇게 가까이서 아련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만남에서 부터 그녀를 마음에 두었던 도준이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도준은 여자에 대한 불신이 강했었고 또 우석과 아련이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눈치를 보였기 때문에 자신은 스스로 아련을 향한 마음에 단단한 빗장을 지르게 된 것이었다. 그 뒤로 넷이서 만날 때도 한참은 아련에게 절로 향하는 눈빛을 수습 못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감에 따라 그런 마음도 옅어졌고 도준이 노력한만큼 그 마음을 접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선주의 존재도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애처로운 모슴으로 자신 앞에 누워 있는 아련을 바라 보니 다시 예전의 그 설레임이 고스란히 되살아 나는 것만 같았다.
선주의 전화에 자신이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며 아련을 걱정했는지, 아련에 대한 우석의 마음이 왜 그렇게도 궁금했는지 도준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아련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도 겁내며 피하고자 했던 진정한 사랑의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스스로 그것을 억누르며 자제했던 까닭에 그 뜨거움이 아직도 식지 않은 채 도준의 무의식 속에서 계속 활활 타오르고 있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병원에서는 아련이 일시적인 영양 결핍 증세를 보이고 있고 워낙 신경이 예민해져 몸이 많이 약해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몸살 기운까지 있으니 당분간은 몸조리에 신경 써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도준은 영양제를 맞으며 깊이 잠든 아련이 깨기를 기다렸다가 자신의 오피스텔로 데리고 갔다. 아련도 별 다른 말이 없이 도준이 하자는 대로만 따라 주었다.
오피스텔에 도착한 도준은 아련을 자신의 침대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아련은 까부라지듯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도준은 아련의 반듯한 이마 위에 손을 대어 보았다. 열도 어느 정도 가라 앉았고 고른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핏기 없이 하얗기만 하던 얼굴에도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음을 확인한 도준은 아련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 보며 평화를 느꼈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아련의 얼굴에 자신의 볼을 살짝 갖다 대었다. 그리고 아련의 입술위로 자신의 입술을 살포시 포개어 보았다. 도준은 자꾸만 그렇게 아련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이토록 간절하게 아련을 원하고 있는 줄을 몰랐던 도준은 자신의 뜨거움이 두려워져 아련에게서 한 발 물러서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의 소파로 가서 담요를 덮은 뒤 오지 않는 잠을 오래도록 청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