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주 - 3>
"다 큰 여자가 그렇게 바깥으로 나도는 것 아니다. 별로 보기 좋지가 않아. 이 참에 그만 집으로 들어 오는 것이 좋겠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깎고 있는 선주는 느닷 없는 아버지의 말씀에 깜짝 놀랐다.
"이미 적응도 되었고...이게 편해요.제게는..."
"네 엄마 때문이란 것, 다 알고 있다.그래도 그 사람 나쁜 사람 아니다. 너도 그건 잘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가족이란 어떤 경우에도 함께 살아야 해. 그러니 내 말대로 하거라."
아버지는 단단하게 결심하신 듯 단정적으로 말씀하신다. 늘 이런 식이다. 이럴 때마다 선주는 명치 끝에 뭔가 묵직한 것이 걸린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낀다. 선주는 걸려 있는 그 무엇인가를 말로써 끄집어 내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채 목구멍에 걸리고 만다.
`아버지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결론 짓지 마세요. 그건 새엄마 때문이 아니에요. 모두가 아버지 때문인걸요. 늘 제 앞에서 벽처럼 서 있기만 하는 답답한 아버지 때문이라구요!'
그러나 선주는 또 속으로만 이렇게 외칠 뿐이다.
그리고 "내 말 알아 들었니?" 하며 계속 다그치는 아버지에게 "시간을 두고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얼른 과일이나 드세요."라고만 대답하고 마는 것이 고작이다.
선주는 퇴근길에 들린 병원에서 새엄마와 동생을 만났었다. 선주를 보자 마자 새 엄마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투박하고 거칠어진 자신의 손으로 선주의 두 손을 꼭 싸 쥔 채 하염없이 고맙다는 말씀만을 계속 하셨다. 허리를 다쳐 움직이기 힘든 동생은 아무 것도 해 주지 않는 선주를 누나라고 다정하게 부르면서 선한 눈빛으로 반겨 주었다. 그것이 오늘은 몹시 고맙게 생각 되었다. 가족의 정이라는 것을 느낄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새엄마는 늘 수척해 보이신다. 자신이 낳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와서 무심한 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돌아 가신 어머니께도 그리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다정 다감한 편이 못 되고 완고하신데다 고집까지 센 분이셨다. 그런 분이 자신의 신념에 굳은 확신을 갖고 행동하면 주위 사람이 얼마나 피곤한지를 선주는 잘 알고 있다. 새엄마도 그런 아버지가 무척 힘드셨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 항상 자신의 뜻대로만 밀어 붙이는 사람. 선주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가끔 우석에게서도 보게 되는 것 같다.
우석은 누가 보아도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분명히 매력도 있다. 하지만 그런 우석에게 선주는 단 한 번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었다. 오히려 우석과 사귀는 아련이 늘 조마 조마하게 보였다. 하지만 선주의 생각과는 달리 우석은 아련에게 늘 자상한 모습으로 대했고 아끼는 마음이 진실해 보였다. 그런데도 일반적으로 따지게 되는 여러 조건들이 워낙 차이가 많이 나는 두 사람이라 과연 그들의 사랑이 완성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늦은 시간에 우석의 전화를 받고 나간 아련이 몹시 상심한 모습으로 돌아 온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를 묻는 선주에게 아련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굵은 눈물 방울만을 줄줄이 쏟아 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선주의 마음도 아파왔다. 더 이상 캐 묻는다는 것이 너무 잔인한 것 같아 선주는 아련을 잠시 혼자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었다.
혼자 밖으로 나온 선주는 자신도 도준의 집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던 까닭에 별 하나 없는 뿌연 하늘만을 바라보며 긴 한 숨을 내 쉬었다. `도준이 내 아이들의 아빠였으면...' 라면을 끓이느라 바삐 부엌을 오가는 도준을 바라보며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것이 말이 되어 그렇게 튀어 나간 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나 비록 실수이긴 하지만 자신의 진심이, 간절한 염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 말에 도준은 "선주 네가 내 여동생이었으면..."이라는 말로 답을 함으로써 두 사람간의 관계에 어떤 선을 분명하게 그어 버린 것이었다. 마음 약한 도준이 자신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던 선주였다. 그러나 진심으로 도준에게 정성을 쏟으면 언젠가는 도준의 마음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으며 용기를 내어 왔던 선주였기에 도준의 그 한마디는 참으로 잔인하게만 들렸던 것이다.
선주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갑자기 회사에서 보았던 아련의 어두운 얼굴을 떠 올렸다. 그동안 어색해진 도준과는 연락을 미루고 있었는데 아련의 일이 너무나 궁금해져서 더 이상 미뤄 둘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 핑계로 좀 더 자연스럽게 다시 연락을 해 보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