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 - 3>
지난 밤 선주는 아버지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급하게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오늘 아침 출근 시간을 훌쩍 넘어서야 회사에 나온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 같아 걱정하고 있던 아련에게 선주는 동생이 운동을 하다가 심하게 다쳤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한 동생을 돌보기 위해 새엄마가 집을 비우게 되어 당분간은 자신이 아버지 곁에서 집안 일을 돌보며 회사에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주는 몸이 고단해 지는 것은 견디겠는데 아버지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말을 하며 잠시 미간을 찌푸렸었다.
매일같이 둘이서 함께 생활하다 보니 선주가 가끔씩 이번처럼 집을 비우게 되면 허전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혼자 만의 고요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좋았던 아련이었다. 그러나 우석과의 연락도 끊겨 심란스러웠던 아련은 지금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더더욱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혼돈스러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우석과 헤어진 아련은 너무도 큰 충격에 휩싸여 머리가 정말 터질 것만 같았다. 간신히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돌아 온 아련은 옴 몸의 기운이 손가락 끝으로, 또 발가락 끝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듯 도저히 몸을 추스릴 수가 없었다.왠지 아련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만 같았던 우석의 화난 얼굴이 그렇게 낯설어 보일 수가 없었고 무엇보다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 보던 그 눈빛에서 모욕감이 느껴져 스스로가 그렇게 비참해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늘 불러 왔던 오빠라는 호칭 하나에도 발끈하며 못 마땅해 하는 내색을 역력하게 드러내던 우석을 바라보던 아련은 그제서야 그동안 자신이 막연하게 느껴 왔던 그 무거운 마음의 실체가 무엇이었는 지를 알 것 같았다.
사실 그동안 아련은 우석과의 만남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생각을 우석보다 앞세운 적이 없었다. 나이로 보나 다른 어떤 조건으로 보나 자신이 우석보다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사소한 결정 하나에도 아련은 우석의 뜻을 그대로 따르기만 했던 것이다. 우석 또한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간의 그런 종속적인 관계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련은 그런 성격의 만남에 자신이 별다른 불만을 갖고 있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밑바닥에 고여 있던 진실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답답하다고만 생각해 왔던 그 감정들이 실제는 나름대로의 불만이 쌓였던 것임을 미처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갑기 그지 없는 우석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쌓여 있었던 그 불만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막상 밖으로 분출된 그 감정들은 더 이상 제어하기가 힘들만큼 사무친 것들이었다.
그래서 아련은 날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해 달라고, 난 당신의 꼭두각시가 아니라고, 더 이상은 끈에 매달린 인형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우석에게 있는 대로 소리 질렀던 것이다. 엄청난 에너지로 그렇게 마음을 쏟아 낸 아련은 그 뒤의 일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의식적으로라도 기억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그리고 기억을 지웠다.
그리고 지친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 온 아련은 그 날만큼은 우석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싶었다. 우석의 목소리조차 듣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전화벨 소리 하나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틀,사흘이 지나도록 우석으로부터의 연락이 없자 어이 없게도 조금씩 그의 전화를 기다리게 되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석에 대한 아련의 분노가 진정되어서라기 보다는 우석의 사과를 받아야만 원망이나 미움에서 벗어나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우석을 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열흘이 지나도록 우석의 연락이 없자 이번만큼은 결코 자신이 먼저 굽혀서는 안 된다는 아련의 독한 결심마저 점점 약해져 갔다. 그리고 선주마저 곁에 없자 더욱 마음이 약해지고 지쳐가는 것이었다. 아련은 어느새 우석이 다시 그리움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약한 마음은 때로 판단력을 어둡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아련은 생각지 않았다. 한 번 방향을 돌려 생각을 전환하기 시작하니 아련의 감정은 급물살을 탄 듯 바빠지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미움과 원망은 순식간에 그리움으로 바뀌고 분명히 우석의 잘못이라고만 생각했던 말이나 행동들까지 모두 다 이해의 눈길로 들여다 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아련의 마음변화에 따른 것이었을 뿐, 결국은 우석의 진실과는 상관없는 변화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석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니 그 날 있었던 일들까지도 고스란히 아련의 잘못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우석에 대한 그리움이 산더미처럼 밀려 왔다. 아련은 용기를 내어 우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따뜻한 목소리를 들으며 잘못했노라고, 보고 싶었노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신호음이 울리는 사이 아련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는 것 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목이 메이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그리운 우석의 목소리가 저 쪽 수화기에서부터 전해져 온다. 아련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입을 뗄 수 있었다
."저, 아련이에요." 오빠라고 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우석은 아련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목소리로 "응...무슨 일이지?" 라고 한 마디만 내 뱉는다.
가대했던 각본과는 너무나 다른 우석의 답에 아련은 순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
"나, 지금 바쁜데...그냥 끊어야겠어. 당분간은 계속 바쁠 거야. 전화도 받기 힘들고..."
너무도 간단하고 너무도 냉정했다. 애타는 마음으로 간신히 연락을 했던 아련은 그제서야 그 날 밤의 우석 그대로를 느낀다. 아련은 뒤늦게 진실을 깨달은 바보가 되어 아무 말도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 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