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희는 석준의 집을 무작정 나섰다. 기분이 나빴다. 승희는 석준이 자신의 몸을 걱정해서 한 게 아니 못 만나다는 것에 화가 나서 승희가 이런다는 말에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정말 내가 그런가하고.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든다. 정말로 석준의 몸이 걱정 되서 그런거였는데 그런 것도 모르는 석준이 미웠고 그런 식으로 밖에 표현 못 하는 석준에게 화가 났다.
「이과장님! 우리 당분간 연락 하지마요」
「언제까지?」
「몰라요. 한 1주일이나 그 이상 쯤요.」
「그동안 나 뭐해?」
「좋아하는 술하고 이 대리님하고 사세요. 관심없으니깐」
「1주일 후에 그럼 다시 만나는 거야?」
「그건 그때 가봐야 알죠. 제가 나중에 연락 드릴께요.」
「너 뭐든지 네 맘데로냐?」
「쉬세요. 연락 드릴께요.」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승희는 애꿎은 핸드폰만 쳐다보면서 왜 전화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승희의 안절 부절과는 달리 석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승희를 잘 알기에 승희가 홧김에 그런 문자를 보냈고 결국은 며칠 있다가 전화가 오리란 걸 석준은 알고 있었나보다. 석준의 예감 데로 승희가 먼저 석준에게 전화를 했다. 이래서 여자들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인 다고 해야 하나?
-여보세요? 왜 전화 안 해요?
-네가 연락하지 말라며. 내가 만약에 연락했으면 너 또 화낼거잖아.
-칫! 밥은 먹었어요?
-응 먹었어.
-넌?
-아직 안 먹었어요.
-왜 밥 먹어야지.
-별로 입맛도 없어요.
-내일 모레 만나자.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너 존대말하지 말아라.
-아니에요. 이제부터 존대 말을 해야겠어요. 반말을 하니까 제가 이과장님한테 함부로 하는
것 같아서요.
-웃기네. 너 화나면 존대말 하잖아. 빨리 반말해. 듣기 싫어.
-왜요.
-존대말 하지 말라고 했다.
-알았어. 내일 모레? 또 기다리게 할려고? 기다리는 거면 싫어요.
-아냐. 그날 토요일이니까 내가 아침에 갈께. 회사 앞으로 갈께.
-정말이지? 이번에도 기다리게 하면 정말 가만 안 있을꺼야. 몇 시까지 올건데?
-12시까지 갈께.
-왠일이야? 그렇게 일찍 온다고 하고
-그때까지 회사 앞으로 갈테니 그렇고 알고 있어.
-점심은 먹었어? 아직 안 먹었었으면 같이 먹자 오빠.
-어디로 갈까? 맛있는데 있나?
-일본식 돈까스 먹을래? 우리 집 앞에 새로 생긴데 있는데 깔끔하고 괜찮을 것 같더라.
-그래. 빨리 먹고 가자.
-어딜 가는데?
-있어.
-어딘데?
석준이 아무런 말도 없이 승희를 데리고 간 곳은 정동진 이었다. 승희는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한 마음에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타자 속으로 혹시 집에 소개시키러 가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승희의 그런 상상은 이내 무너졌다. 석준은 처음 가보는 길이라면서 정동진을 향했고 천안에서 2시 쯤에 출발한 그들은 7시 쯤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방을 잡고 잠깐 바닷가에 나갔다. 밤바람이 시원했다. 그 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마치 서로 다른 곳을 꿈꾸는 듯 했다. 석준과 승희는 항상 그런 식으로 싸웠고 사소한 문제들로 항상 다투곤 했다. 물론 다투고 난 다음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로 얘길 했지만 아마도 그런 것이 문제 것이 문제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서로에게 쌓여가는 불만을 서로 풀지 못해 둘 사이의 마음이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서로에게 기대면 기댈수록 서로 아파해야함을 알았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포장마차 같은 곳으로 향하여 홍합과 소주 한 병을 시킨다. 마시지 못하는 소주를 승희는 벌써 3잔이나 비어냈다. 석준은 승희에게 마시지 말라며 승희를 다그치지만 승희는 괜찮다며 이내 소주잔으로 손을 옮긴다. 술이 마시고 싶었다. 그냥 갈증이 나서 소주가 마시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하고 소주를 마셔본 일이 없네. 매번 나 때문에 같이 있어도 맥주만 마시며 나한테 맞춰주던 사람이네.
-소주도 못 마시시면서 왜 마시는데
-그냥 오늘은 한번 마셔보고 싶어.
-그만 마셔. 벌써 3잔이나 마셨잖아. 아줌마 여기 콜라 한 병만 주세요.
-오빠 속 괜찮아? 밥도 제대로 못 먹잖아.
-괜찮아. 왜 이런지 모르겠다. 도대체
-정말 오빠 몸 중에 한군데라도 멀쩡한 데가 있는지 모르겠다. 젊은 사람이 말이야. 뭐
그렇게 아픈 데가많은지 모르겠어. 간 안 좋지, 당 있지, 장도 안 좋지. 거기다가 먹는 약은
도대체 몇 개인지 모르겠다. 오빠가 아프지 말아야지. 오빠도 편하고 부모님도 편하고
나도 좋지. 매일 아프기만 하냐? 아프지 말아라 정말로. 차라리 내가 아프고 말지...
-......
-오빠. 나 발 시려워.
-들어갈까?
-응.
초여름이었다. 사람들은 반팔과 반바지 차림에 여름용 샌들을 신고 다니는 계절이었다.
승희는 방으로 들어와서도 계속 발이 시렵다며 울었다. 석준은 떠올렸다. 처음 승희와 함께 했던 날. 그때도 승희는 술이 많이 취해서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었다. 엄마는 항상 자기가 발 시렵다고 하면 발을 주물러 줬다고 했다. 석준은 울면서 발 시렵다며 엄마를 찾는 승희를 바라본다. 그리곤 승희의 발을 주물러 줬다. 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승희에게 말을 건네면서 승희의 발을 주물러 줬다. 따뜻했다. 엄마가 되었건 아니건 간에 자신이 서럽게 울고 있을 때 옆에서 누군가가 위로를 해준다는 것에 눈물이 흘렀다. 승희는 왜 울었을까? 홍성에 있었을 때도 울고 이곳 정동진에 와서도 발이 시렵다며 울었다. 발이 시려운 게 아니라 가슴이 너무도 시려워서 울었던 것은 아닌가? 자신의 찬 가슴을 녹일 방법이 없었던 게 아닐까? 석준은 승희를 잘 안다. 승희의 모습을 수 개월 동안 지켜봤으니... 처음 석준이 승희의 모습을 봤을 때를 떠올린다. 항상 밝게 웃고 순수하게 보이던 모습이었다. 톡톡거리면서 말도 재미있게 하고 세상에서 고민 같은 것은 하나도 갖지 않고 사는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너무도 씩씩하고 활발했다. 하지만 이내 석준이 알아버린 건 승희는 자신이 약해질수록 겉으로 강해진다는 걸.
그래서 승희는 항상 웃고 떠들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석준이나 다른 사람의 말 장난에도 쉽게 받아치면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곤 했었다. 그런 걸 알기에 석준은 승희의 우는 모습에 애처로워 보였다.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고 가슴에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숨기고 사는 게 어떤 건지... 마치 가슴에 멍을 안고 살아가는 것 처럼...
승희는 항상 울었다. 속으로 울었다. 워낙 눈물이 많은 타입이라 항상 눈물을 달고 살았다. 승희가 석준에게 처음 눈물을 보였던 때가 홍성에서 이후에 정동진에서가 처음일 것이다. 속상한 일이 있고 속이 답답하고 해도 석준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며 ‘여자는 강해야 하는 거야’라며 석준에게 당당하게 말했었는데... 지금 승희가 우는 모습 앞에 그런 말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저 불쌍한 아이가 우는 것처럼 서럽게 훌쩍거리고 있다. 차라리 소리라고 크게 내서 울지 우리 둘이 있는데도 뭘 숨긴다고 소리 죽여 우는 건지......
-오빠! 일어나. 해 뜨는 거 본다면서.
-어......지금 몇 시야?
-5시 30분 다 되가. 해가 뜨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그래? 내 안경 좀 줄래? 해 아직 뜨고 있는 중이네. 아직 솟아오르지는 않았고.
-다행이다. 정동진에서 해 뜨는 거 보기 정말 힘들다고 하더라.
-넌 어제 다 울었냐? 엄마 보고 싶어. 발 시려워. 하면서 울고 불고.
-내가 언제 그렇게 울었어. 나 어제 일 다 기억나 왜 그래.
-그런데 발이 왜 시렵냐?
-몰라. 가끔 그렇게 발이 시려울 때가 있더라. 워낙 몸이 차니까 가끔 엄마가 발도
주물러주고 어떤 때는 겨울에 일부러 양말 신고 잘 때도 있어. 발 시려워서.
-그래? 하여간 이상해. 넌. 야 해 뜬다.
-오빠. 우리 해 뜨는 것 보고 바닷가 가서 좀 놀다가 집에 가자. 그런데 오빠 피곤해서 어떻게
하냐? 눈 밑에가 또 까매졌다. 참. 오빠 저번에 내가 사준 간장약은 잘 먹고 있는 거야?
-계속 먹고 있어. 그런데 또 까매?
-응. 오빠 몸 안 좋은 거 아냐? 오빠 몸 이상하거나 하면 눈 밑에 까매지잖아.
-피곤해서 그런 걸 꺼야.
-꼭 이런때 아프냐. 그런데 갑자기 정동진은 왜 온거야?
-그냥. 사실은 그때 너랑 얘기하다가 네가 그랬잖아. 한번도 오빠랑 어디 여행 가본적도
없다고 남들은 다 가는데 한번도 못 가봤다고 했을 때 괜히 마음이 짠 하더라. 그래서 같이
여행도 다니고 해야 겠구나 했지. 다음주에도 갈꺼야?
-정말? 왜 그래? 오빠 일은 언제 하고?
-토요일 날 갔다가 오면 되는 건데 어때서. 다음 주에도 갈 테니까 어디로 갈지 정해봐
-오빠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이상하다는데 왜 그래?
-간다고 해도 이상해 보이냐?
-응 이상해. 음... 그럼 어디가지? 멀리는 못 가잖아. 오늘도 너무 멀리 왔는데
-아냐. 멀리 가는 것도 괜찮아. 말 나온 김에 같이 여행도 다녀야지.
-그럼 내가 정한 다음에 알려줄께. 그리고 좀 자. 해 뜨는 것 봤으니까. 보기 흉하다.
얼굴도 까맣게 탔는데 눈 밑에까지 그늘지니까.
-그래. 자야겠다. 넌 안 자?
-나도 좀 자야지. 나도 어제 술 먹었더니 괜히 피곤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