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 씨. 잘 잤어?
-어. 몰라. 미치겠다. 눈도 안 떠지고 왜 이렇게 눈이 아픈 건지. 어떻게 승희 씨 잘 일어났네?
-나야. 아침잠이 없어서 그런지 좀 일찍 일어났어.
-경선! 어제 나 부안에 갔다 왔거든.
-부안? 거기 전라도 아냐? 거길 왜?
-어 최 사장님 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상가 집에 가느라구
-최 사장님이 누군데?
-아 참. 여기 도급사 사장님이시거든.
-응 그런데
-거기 가는 길에 이과장님하고 문자를 보냈거든 통화도 하고 했거든.
승희는 경선에게 어제 있었던 석준과의 대화내용과 문자를 떠올리며 자세히 얘길 해줬다. 그런 얘길 왜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경선의 말데로 관심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어제 그렇게 까지 얘길 하고서도 확실한 얘기가 없었다. 승희는 괜한 일에 시간 낭비라며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 다시 일을 했다. 하지만 은연 중에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괜히 전하기만 쳐다보며 하루일과를 마치고 승희는 지친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여보세요?
-승희 씨. 이석준이에요. 뭐하세요?
-빨래하려고요. 세탁기에 옷 넣고 있었죠. 이 시간에 전화 안 하시잖아요.
-오늘은 좀 일찍 출발했거든요. 저녁 먹었어요?
-아뇨. 아직요.
-그럼 같이 저녁이나 먹을래요?
-왜요? 저야 괜찮지만요. 마감이 내일 모렌데 이래도 되요? 과장님?
-어차피 승희 씨도 저녁 혼자 먹잖아요. 그리고 저녁 한 끼 먹는 거하고 마감이 무슨
상관이에요. 제가 30분 후면 홍성에 도착하거든요. 집 앞으로 나와 계세요.
-백과장님도 계신데 왜 저랑 같이 저녁 먹자고 하세요?
-백과장님하고 요즘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요. 이럴 땐 첫째로 피하고 봐야 해요.
-나오신다면서요.
-네. 나가야 하는데 집을 알아보러 다닐 시간이 없어서요.
-그건 핑계죠. 과장님 일요일 날에도 가실 수 있는 거 잖아요.
-그렇긴 하죠. 하여간 빨리 알아봐야 백과장님이나 저도 스트레스 안 받죠
-요즘 일이 많으시죠. 하긴 부여가 저번 달에 900톤 넘었으니. 그 정도면 과장님도 바쁘실 만 하네요.
-아직 일은 서툰데 할일도 많고 해 달라는 것도 많고 노부장님한테 대리점 요구사항을 얘기 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얘길 하시니까요. 제 딴에야 어떻게든지 해 보려고 하는데
장애물이 참 많네요.
-좀 힘드신가 봐요? 그런데요. 제가 어느 책에서 봤거든요.
사람에겐 다 같은 양 만큼의 행운을 준데요. 일이 너무나 잘 풀리는 사람은요. 10개의 행운 중에 7개를 다 써 서 앞으로 남은 행운은 3개지만, 일이 자꾸 꼬이기만 하는 사람은요. 10개 행운 중 3개만 써서 앞으로 남은 행운이 7개나 있어서 앞으로 잘 풀릴꺼래요. 그러니깐 과장님도 힘들다고만 생각지 마세요. 고진감래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깐 기운내세요.
-고마워요. 승희 씨한테 좋은 얘기도 듣네요. 그 행운 얘기는 정말 좋네요.
-아니에요.
-승희 씨. 술 한잔 어때요?
-지금요? 저녁 먹어서 배부른데... 그리고 좀 피곤하지 않으세요?
-여기 2층에 호프에 가서 간단하게 한잔하죠.
-그래요. 그럼
둘은 호프집으로 향했다. 맥주 500cc를 시켜놓고 안주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새우깡을 먹었다. 왠지 모를 어색한 침묵이 흘러 승희는 그저 창밖만 내다보고 석준은 자신의 핸드폰만 만지작 거렸다.
-여기 자주 오시는 곳 인가봐요?
-아뇨. 저번에 이대리님하고 왔었거든요. 기억이 나서요.
-네. 그런데 저 옆 테이블은 아직 학생들 같은데. 보고 있으니까 재밌네요.
-대학생 쯤 된 것 같은데요. 나도 어릴 땐 저렇게 술 먹고 해도 거뜬 했는데
-참, 그때 병원에 입원 하셨었다면서요. 왜 그런거에요?
-다른 특별한 건 없구요. 급성 당뇨에요.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이것 저것 해가지고요.
-원래 집안에 당뇨병이 있는 건 아니구요.
-아니요. 저희 집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왜 그런 거에 걸려서...고생 하시나.
-이러니깐 여자친구가 없는 것 같아요. 누가 저 같이 몸 안 좋은 사람 만나겠어요.
-왜요. 이과장님을 정말로 좋아하면 그런 걸 누가 따져요. 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그럼 승희 씨는 승희 씨가 정말로 좋아하면 그런 남자라도 사귈 수 있다는 거에요?
-당연하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 아프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아닌 딴 남자랑 어떻게 만나요.
-그렇게 생각해요?
-네. 아직 어린가? 아직 제대로 된 사랑 같은 거 안 해 봐서 그런지도 모르지만요.
이런. 얘기하다보니깐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요. 집에 가요. 이젠
-그래요.
-호호 이것 가지고 계시네요?
-어떤 거요? 아. 그 방향제요. 그런데 그거 냄새가 안 나요.
-그래요? 주세요. 제가 다시 해서 드릴께요.
-아니에요.
승희가 지난 석준의 생일날 해준 선물이었다. 토이의 베스트 앨범 cd와 함께 석준이 태어난 5월의 탄생화인 튤립을 앞뒤로 십자수로 꼼꼼하게 처리하여 그 안에 방향제를 넣고 바깥쪽을 촘촘히 정성스레 박음질을 하여 선물을 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