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자 셋은 다소 친숙한 분위기속에서 대화를 나눴다.
-경선 씨. 지역과장이 김종명 과장이죠? 어때요? 잘 해요?
-글쎄요. 저야 지역과장님하고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요.
그런데 아직은 좀 헤매는 것 같더라구요. 과장님도 이쪽으로 내려오신지 얼마
안 되셨다면서요.
-네. 회사에 입사한건 1년 넘었는데 부여.서천 맡은건 이제 6개월 밖에 안 됐으니 아직
신입사원이죠..
-이과장님은 여자친구 없으세요?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주말에 홍성에서 이러고 계시는 걸
보니...
-없으니깐 이 좋은 주말에 여기에 있죠. 허허허
-어~~~! 그럼 잘 됐네요. 승희랑 같이 사귀면 되겠네요. 승희도 어차피 혼잔데.
-저야 좋죠. 뭐.
-둘이서 재밌어요? 빨리 술이나 마십시다. 백과장님은 서울 집에 가셨다고요.
-네. 아마도 내일 저녁이나 돼야 오실 것 같더라고요.
-우리가 부르지 않았으면 심심하셨겠네요.
-그랬겠죠. tv나 비디오도 보다가 잤겠죠.
-tv요? tv본지 무지하게 오래 됐는데. 그리고 비디오도. 이번 김에 집 구경이나 시켜주세요.
-그래요. 이과장님. 같이 사신다는 과장님도 안 계신다면서요.
-안돼요. 백과장님 알면 혼나요. 그리고 집도 지저분하고 냄새도 나고요.
-어때요. 백과장님한테 얘기 안하면 되는 거고 사람 사는 집이 늘 그렇죠 뭐
-경선. 일어나 가자. 우리 바로 1층이니깐. 이과장님 저희 먼저 나갈께요.
-잠깐만요. 그럼 같이 가서 밖에서 조금만 기다려요.
-네
-아~~뭐야 그냥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집도 지저분한데
-어때요. 남자들 사는 집 지저분한 거 다 알아요. 어머나~ 그런데 정말 지저분하다.
잠은 어디서 자요?
-여기서요.
-둘이 살기 너무 좁겠다. 그치!
-그러게. 이 과자님 덩치고 크고 백과장님도 큰데 좁아서 어떻게 살아요?
-그냥 구겨서 자요. 허허허 그리고 제가 나가야죠. 백과장님이 하도 나가라고 하시니까여.
-흠... 비디오다. 테이프도 있네. 하나만 봐요. 과장님.
-아니에요. 볼 것도 없고 좀 그런거라서
-이름 없는 정체불명의 테이프들. 어때요. 그리고 저 한번도 못 봤단 말예요.
경선. 너 저런 거 봤냐?
-나야 많이 봤지... 이과장님 어때요. 틀어요.
-안돼요. 이런 걸 어떻게 여자들하고 같이 봐요.
-뭐가 어때서요. 그리고 우리가 무슨 여자에요. 직장 동료지.
-참 안된다니까요. 비디오 작동법도 잘 모르구요.
-그럼 제가 틀어서 봐도 되죠?
-야. 승희야 포기해라. 그리고 나 피곤해. 가서 자자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봐.
-승희 씨. 경선 씨랑 같이 가요. 저도 이젠 피곤해요.아~ 자야겠어요.
-무슨 얘기에요. 전 오늘 이것 꼭 보고 갈꺼에요.
-승희야. 그럼 나 먼저 가서 잘게
-그래. 나도 바로 갈게
-과장님~~~! 딱 한번만요. 네? 저 한번도 못 봤단 말에요
-아~ 제발 승희 씨 그만해요. 저 피곤하단 말이에요.
-흠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승희는 석준의 그런 말에 무안함을 감출수가 없었다. 어쩌나 하는 순간 잠든 석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비디오 못 보게 몸싸움 하느라 엎치라 뒤치락 거리는 사이 손톱으로 그의 팔 안쪽에 낸 상처를 보니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집으로 올라온 승희는 잠든 경선을 보고 어지러워진 방안을 대충 정리한 뒤 잠을 청한다.
-아~. 몇 시야?
-열시. 더 잘래?
-응. 30분 후에 다시 깨워줄래?
-그래. 더 자
-경선. 10시 30분이야. 일어나.
-아. 졸려 죽겠다. 너 속 괜찮냐?
-나 어제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 그러게 너는 술 많이 마실 것처럼 얘기했으면서 그리고
술도 많이 먹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마시냐? 그러고 보니깐 너도 나이 들었나보다 그거
조금 먹고 속 불편하다고 하는 것 보니.
-어휴..몰라.
-세수하고 와. 북어국 했다.
-너 왠일이냐?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무슨 얘기야. 요 앞 편의점에 가면 다 팔아. 맛있더라.
-그럼 그렇지 뭐... 나 수건 좀 줄래
-응. 여기
-야. 이거 그래도 정말 먹을 만 하다. 맛있는데
-간만에 왔는데 이런 것만 줘서 미안하다. 보다시피 살림살이도 없고 해먹기도 귀찮고 해서.
다음엔 내가 요리 좀 배워서 맛있는 것 해 줄게
-됐어. 이런 게 어디야. 난 집에서 라면 끓여 먹어. 그것 보다야 낫지.
-그렇게 생각해주면 다행이고.
-그런데 어제 이과장님 보니깐 사람 괜찮더라. 선해 보이고.
-그렇지! 사람 괜찮아 보이지!
-이과장님 선해 보인다는데 왜 네가 좋아하냐? 그리고 너한테 관심있는 것 확실해
-정말? 어떻게?
-너 쳐다보는 것도 그렇고 어제 너한테 하는 것 보니까 호감 있는 것 확실하던데. 조만간에
좋은 소식 들리겠구나. 나야 지금 네가 이 과장님 좋게 생각하는 것 같으니깐 나도 좋지만
하여간 신중해라.
승희는 경선의 그 말에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아직 석준에게서 어떤 얘기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석준의 표정 속에 드러난 승희에 대한 호감을 읽어낸 경선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다.
승희에겐 딱 한번의 첫사랑이 있었다. 정말이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첫사랑이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사랑은 아니었지만 그 일로 승희는 상처를 입었었고 그걸 아는 경선이기에 아이처럼 좋아하는 승희에게 신중하라는 충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가고 있는 터 그래서 사랑에 목말라 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승희야. 가야겠다. 피곤하고 낼 출근하려면 가서 준비 좀 해야지.
-그래? 미안해서 어떻게 해? 와서 쉬지도 못하고 술만 먹고 가네
-됐어. 이과장님하고 잘 해봐라. 나중에 얘기나 해줘
-인연이 있으면 잘 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그래 알았다. 나 갈게. 나오지 마
-미안해. 나가지도 못한다.
-됐어. 덥다 들어가. 나 갈께. 내일 통화하자.
-승희 씨. 경선 씨 갔어요
-아까 1시 쯤에 갔어요. 참 어제 상처는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흉이 좀 남을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자다 일어났어요?
-네. 좀 피곤해서요. 상처는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것 아니에요.
-됐어요. 피곤한데 그럼 어서 자요.
-네. 과장님도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