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석준입니다.
-아~네.
-주무시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직 안 잤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넷텀 사용방법을 잘 몰라서요.
현재 마감 된 것 까지 해서 월보랑 일보를 좀 뽑아야 하거든요.
-네에……. 컴퓨터 부팅된 상태죠. 제가 말하는 것 좀 받아 적으실래요?
-네 말씀하세요.
-다 적으셨죠? 그것대로 하시면 되요.
-승희 씨 고마워요. 신희 씨한테 전화했더니 신희 씨가 자나봐요. 전화를 안 받아요.
참. 그것 농협 건 문제는 잘 해결됐어요?
-아직요
-어떻게 하려고요? 본사에선 무슨 말 없어요?
-어떻게 든지 되겠죠. 상호 간에 자료가 안 맞으면 문제가 발생하는 건데 설마 그 쪽에서도
가만히 있겠어요. 어떻게 든지 되겠죠. 뭐. 고맙습니다. 걱정해주셔서요.
-고맙긴요. 그리고 나도 고마워요. 미안해요. 잠자는 것 깨워서 빨리 자요.
-승희 씨 어제 잘 잤어?
-나? 그냥 잤지. 밤에 갑자기 이과장님이 전화해서 뭐 물어봐서 좀 그렇지.
-그래? 엊그제도 나한테 전화해서 자료 뽑는 거 물어보더니만.
이석준 과장은 번갈아 가면서 승희와 신희에게 자료 뽑는 방법을 알려달라며 전화를 했다. 권신희가 잠에 취해 제대로 전화를 못 받으면 바로 승희에게 전화해서 알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두어 달의 시간이 지났고 승희의 실수도 잘 마무리 되어 홍성에서의 생활은 한결 나아졌다. 함께 일하는 이용훈 대리와 권신희는 승희의 오래간만에 저녁을 먹으며 가볍게 술자리를 갖고 있었다.
-승희 씨. 농협 건 때문에 그 동안 맘고생 많았죠.
-아니에요. 제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거였는데요. 뭐
-하여간 일이 잘 해결됐으니깐 마음 푹 놓고요. 이젠 고민 그만해요.
-하하 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건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다. 많이 사랑했던 만큼 많이 미워한 그 사람.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사이였지만 어쩌면 그들의 만남은 외로움의 시작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서로가 너무도 외로워 함께 하고파 서로를 찾았을 뿐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고 시작하였다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외로움의 갈증은 채워지질 않고 남겨진 건 이기적으로 변한 서로의 모습과 혼자인 게 편하다는 생각들을 갖게 한다.
어차피 이미 결정된 끝이 보이는 만남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 시작했던 단순한 만남. 서로 모르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싹트게 하였으나 책임질 수 없는 감정이었을 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책임이 따른다.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서로에게 집착해야할지도 모를 책임-물론 사랑으로 표현하는 그것을 집착이라는 것은 얼토당토한 말-이라던지. 사랑하기에 헤어짐 뒤에 있을 아픔의 책임……. 그 사랑의 아픔은 한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다. 서로 사랑하는데 있어 한 쪽이 더 사랑하고 한 쪽이 덜 사랑하고는 없다. 서로가 같이 사랑하는 것뿐이며 그래서 사랑의 아픔 역시 둘의 같은 몫이다. 같이 아파해야 할 부분이다.
‘이상하다. 지금 쯤 이면 전화 올 때가 됐는데. 휴. 전화 안 할려나보다. 괜히 기다렸네’
-여보세요?
-승희 씨. 이석준입니다. 뭐하세요.
-저여? 십자수 하고 있었어요.
-네. 저 지금 홍성 가는 중이에요.
승희는 침대에 기대어 석준의 전화를 기다렸다고 말 대신 십자수 하고 있었다고 둘러댄 자신의 행동이 우스웠다. 석준은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승희에게 계속 얘기했다. 승희는 속으로 이 사람이 왜 내게 이런 얘길 하는지 모르겠다며 석준의 얘길 모두 들어주었다. 남자들이 흔히 쓰는 방법으로 석준은 매일 저녁 8시가 되면 승희에게 전화를 했고 승희는 매일 오던 석준의 전화를 기다리는 자신을 그리고 그럴수록 석준이 달라보이는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경선. 이상해. 나 어떻게 하지?
-무슨 일인데. 너 또 사고쳤냐?
-사고는 무슨. 그게 아니라.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지역과장님 중에 당뇨병으로 입원했다던?
-응
-이석준 과장님이라고 하는데
-왜? 그 사람이 너보고 사귀자고 하니?
-그런 건 아닌데. 며칠 전부터 같은 시간에 계속 전화해서 자기 얘길 막 하는거야. 그런데
어제는 좀 늦게 전화가 오더라고. 그런 거 있잖아. 매일 같은 시간에 전화해서 좀 늦게
하거나 해서 기다리게 하는거. 그래서 어제 나 괜히 그 사람 전화 기다렸잖야.
-야....! 그 과장님 너한테 작업 들어오는 거 아냐?
-작업은 무슨.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자꾸 전화하고 하니깐 느낌이 이상해서 그렇지.
-이상하긴 좋으면 좋은거지. 그 사람 어떤데? 잘 생겼냐?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사람 착해 보이고 좋은 사람 같더라.
-그런데
-아직 그쪽에서 딱히 뭐라고 얘길 하는 게 아니니깐 답답해서 그렇지.
-너 그 사람이 무슨 얘기할 때까지 절대 내색 같은 거 하지 말아라. 그리고 나 이번 주에
놀러 갈께.
-내색은 안하지. 신경만 쓰일 뿐이지. 그리고 몇 시쯤에 올껀데?
-회사 마치고 바로 가야지. 여기서 3시 30분에 마치면 4시에 출발한다고 하면 5시 정도에
도착하겠다.
-그래. 버스 타고 올꺼지? 그럼 대충 시간 맞춰서 내가 나가 있을께
-신희 씨! 오늘 경선 오기로 했는데 같이 저녁이나 먹을래?
-그래. 그런데 오늘 대리님도 일찍 가시고 누가 시내까지 태워다주지?
-택시 부르지 뭐. 남들 귀찮게 뭘 태워다 달라구하냐.
-무슨 택시야. 돈 아깝게. 잠깐만 기다려봐! 이과장님!
-네?
-오늘 일찍 끝나세요?
-조금만 하면 되는데요. 무슨 일 이신데요?
-저기요. 저희 시내까지만 태워다 주시면 안돼요? 타고나갈 차편이 없어서요.
-네. 그러세요.
-죄송해요. 아산대리점 여직원 온다구 해서요. 시간 맞춰 나가야 하거든요.
-그 여직원 몇 시에 오는데요?
-승희 씨. 경선 몇 시에 온데?
-도착할 때 쯤에 전화 준다고 했거든. 그런데 아마 5시 좀 넘어서 도착할꺼야. 이과장님이
태워다 주신데? 과장님! 고맙습니다. 난 그럼 남은 일이나 좀 해야 겠다.
-그래. 난 모하나?
-신희 씨. 운전면허 있다고 했죠! 1종이에요. 2종이에요?
-1종이요
-1종요? 대부분 여자들 2종 따던데
-1종이 더 쉽다고 해서 그냥 1종으로 땄어여. 저기...과장님 차 한번 몰아봐도 돼요?
-안돼요.
-아~이. 과장님. 과장님이 조수석에 타서 봐주시면 되잖아요. 그리고 저 우리 오빠 차도
몇 번 운전해 봐서 다 알아요. 여기 근처만 갔다와요. 네?~ 과장님
승희가 남은 일을 하는 사이 석준과 신희는 그렇게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한다고 영업소를 나갔다.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오지 않자 승희는 괜히 조바심이 일어난다. 혹시나 기다릴지 모르는 경선생각과 둘이 뭘하길래 이렇게 늦나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싼타페 한대가 영업소를 천천히 들어온다. 차에서 웃으며 같이 내리는 그들을 보며 승희는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너무나도 다정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우. 뭐에요. 5시 훨씬 넘었는데 늦으시면 어떻게 해요?
-승희 씨 미안해. 이 근처만 돌다오는 건데 내가 저기 멀리 까지 가자고 해서 그랬어.
과장님. 빨리 가요. 경선 기다리겠어요. 승희씨 가자. 미안해.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차에서 같이 내리면서 웃는 그들의 모습이 승희의 머리 속에 계속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경선 미안해. 많이 늦었지.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 그리고 홍성 무지하게 시골이다. 정말.
-영업소에 있는데 자꾸 전화와서 그러다 보니깐 좀 늦었다. 미안... 배 고프지 우리 밥이나
먹으로 가자. 참. 여긴 신희 씨. 매일 전화로만 통화했었지. 신희 씨 여긴 아산 상담소
김경선씨.
-권신희 씨라고 했죠. 반가워요. 매일 전화만 했는데 드디어 이렇게 얼굴 보내요.
-나도요. 그리고 우리 동갑인데 말 놓죠. 얼굴 못 생겼다고 했는데 괜찮게 생겼네 뭘.
그리고 피부 진짜 하얗다. 부럽다.
-신희 씨. 여기 근처에 갈만한 곳 있나? 내가 아직 지리를 잘 몰라서
-여기? 음... 저기 닭갈비 집 있는데 맛있거든 거기 갈래?
-경선 닭갈비 괜찮아?
-나야 지금 배고파 죽겠는데 뭔들 안 맛있겠냐? 가자! 거기 가깝지? 걷기도 힘들다
-얼마 안 걸려.
-아줌마. 여기 닭갈비 3인분하고요 콜라 한 병요.
-야. 맛있겠다. 그런데 이거 승희 네가 쏘는거야?
-당연하지. 아산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사야지. 비싸지는 않아도...
따르릉....
-여보세요
-승희 씨. 저 이석준인데요.
-네. 이과장님.
-저기 방금 전에 천안 대리점이라고 전화 왔었는데 사료 재고 되는지 확인 좀 해달라는데요?
-어떤 건데요?
-베이브 sew 5포랑, 베이브 맥 크럼블 10포요.
-잠깐만요. sew는 재고 있고, 맥이... 신희 씨 우리 베이브 맥이 재고 얼만 지 기억해?
-몇 포 주문인데?
-10포
-10포는 있을꺼야.
-이과장님 2개다 재고는 있거든요. 그런데 혹시 모르니깐요. 그거 메모지에 적어서 제
책상에 놔 주시겠어요? 제가 월요일날 조출이거든요. 그때 가서 재고 확인하고 우선
맡아두면 되거든요.
-아..그래요. 그럼 대리점에 그렇게 말 하면 되는거죠.
-네. 부탁 드릴께요. 수고하세요.
-하여간 천안 대리점은. 미리미리 전화해서 주문하면 오죽 좋아. 꼭 퇴근 할 때나 퇴근 하고
난 다음에 급하다고 하면 단가. 여기가 사료 공장도 아니고. 지겹다.
-누구야?
-내가 저번에 얘기했었잖아. 이석준 과장님. 천안 언니가 전화했었나봐.
-경선 씬 오늘 그럼 승희네 집에서 자고 가겠네?
-그래야지. 간만에 왔는데 술도 좀 마시고 집 구경도 해야지. 야! 집 구경 시켜줄꺼지.
-그런데 손님이 올때 선물 사가지고 가야하는거 아냐? 나 지금 돈이 궁하니깐 돈으로 줘
-그럴 돈 있으면 내가 쓰겠다.
-이석준 과장님 이라는 분 불러봐.
-됐어. 불러서 뭐해. 너도 좀 어색하잖아. 그리고 그분 몸도 좀 안 좋아. 그냥 우리끼리 술
마시자.
-무슨 상관이야. 잠깐 얼굴 보자는 건데 이 오피스텔 1층에 산다면서 잠깐 올라왔다가
가는 건데 어때? 그리고 이과장님 저녁도 안 먹었을 지도 모르잖아. 주말인데 심심할텐데
올라오시라고 해봐.
-정말? 그래볼까?
-여보세요? 이과장님. 저 이승희 에요.
-아산 여직원은 잘 만났어요.
-네. 만나서 저녁 먹고 지금 집에서 같이 술 먹고 있거든요. 괜찮으시면 올라오실래요?
술이나 마시면서 도란도란 얘기나 하게요. 그리고 백과장님 계세요? 계시면 같이 오세요.
-아뇨. 백과장님은 서울 집에 갔고요. 혼자서 심심하던 참이었는데 올라갈께요. 술 말고 뭐
다른 것 필요한 것 없어요?
-괜찮아요. 그냥 오셔도 되요.
-그럼 술만 몇 병 더 사가지고 바로 올라 갈께요.
-야. 뭐래? 온데?
-응.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그 사람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냐?
-관심은 무슨 관심. 여자 친구도 있을 것 같아.
-어. 솔직히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전화해서 자기한테 있었던 일 다 얘기하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고 하는 거 보면 그게 관심이지 뭐냐.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난 잘 모르겠다. 아무나한테 다 저러는 건지도 모르니깐.
-네가 아무나냐? 내 생각이 맞다면 확실히 관심이야. 넌 이과장님 어떤데?
-나? 글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나쁜 점은 잘 모르겠어.
-그래? 아무 느낌도 없는 것 같은데...
-누구세요?
-이석준 입니다.
-네. 뭘 이렇게 사가지고 오셨어요. 그냥 맥주 몇병만 있으면 되는데...
-그냥 사다보니깐 이것 저것 산거죠. 뭐 허허허
-여기는요 아산 상담소 김경선 이구요. 이쪽은 부여.서천담당하고 계신 이석준 과장님.
-어머.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네? 허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