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이승희.
한국제당 한국사료 천안영업소. 이곳이 승희가 일하는 곳의 소속이다.
오래된 전통을 지닌 회사이지만 요즘은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사료 회사와의
가격경쟁에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나 아직은 건재한 듯 숨쉰다.
일반 유통, 물류 회사와 마찬가지로 본사 밑에 각각의 사료를 생산하는 공장과
공장에서 생산된 사료를 실어 와서 각지로 유통해주는 영업소 그리고 영업소에 와서
사양가에게 사료를 배달해 주는 대리점과 그런 대리점과 사양가 관리를 하는 지역과장.
이것이 한국 사료의 조직체계이다. 지역과장은 전국을 구분하여 몇몇 지역을 묶어서
관리한다. 실제로 근무를 시작한 지역을 이들은 필드라 부르며 각 필드에 배치 받기 전에
1년간을 농장이나 타 지역에서의 실습을 통하여 실전에 들어가기 전 철저히 교육을 받는다.
-여보세요.
-홍성영업소 권신희입니다.
-어. 신희씨. 나 승희야.
-승희 씨.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어때 일은 좀 할만해? 아직 좀 힘들지.
-처음이니깐 힘든 거겠지. 입사한지 1달이 되가는데 지금까지 계속 밤 11시에 퇴근했다니깐
-정말? 왜?
-그냥 이것저것 하다보니깐 그리고 아직 잘 모르는 게 많아서 계속 일이 밀려가지고 좀
늦게 퇴근해
-그래. 힘들겠다. 시간 지나면 잘 하겠지 뭐
-고마워
-사실은 나 며칠 전에 인희 씨한테 들었는데 우리 지역과장님 중에 당뇨로 병원에
입원하신 분 있으시 다면서 그게 궁금해 가지고 전화했지.
-응. 승희 씨 몰랐어? 부여.서천 맡고 있는 분인데 원래는 전주에서 생활하다가 중부본부로
이번에 새로 배치 받았는데 필드에서 일하더니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하던데
-그래? 누구지? 부여.서천?
-이석준 과장님이라고 나이가 올해 28살이라나?
키 좀 있고 체격도 좀 있는데 한번도 본적 없어?
-응.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그래? 그래서 그분 병원에 입원해서 부여.서천을 지금 노현묵 부장이 맡고 있거든.
-그래. 누군지 궁금하네.
-나도 얘기는 많이 안 해 봤어. 일 때문에 몇 마디 나눠본 게 전부인데 착하신 분 같더라.
-불쌍하다. 젊은 분이 웬 당뇨병이냐.
-그러게. 불쌍하지. 승희 씨 미안. 지금 차 들어왔거든. 오다 끊어야겠다.
-그래. 수고해!
-언니! 누구래요?
-글쎄? 부여.서천이 우리 중부본부소속이야?
거기 담당하는 지역과장인데 이름이 이석준과장님 이라네.
의아했다. 언제 부여.서천이 중부본부로 합류하여 관리하였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조직 상 위에서 하는 얘기 전부가 영업소 직원들에게 전달되는 것도 아니고 전달 과정
중 빠지기도 하고 영업소 직원은 한국사료 정 직원처럼 생각지도 않는 면이 있으니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차피 사료 출고 역시 천안영업소에서 행하여지는 것도 아니니까.
가끔 그런 얘길 했었다. 천안 영업소 없어지고 홍성으로 발령이 나서 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겠지? 그런 질문에 항상 대답이 없던 사람이었다.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한국 사료 내부에선 대대적인 일이 추진 중이었다. 남세원 상무의 취지 하에 사료 물류비의 절감을 위해 전국 2곳의 영업소를 폐쇄키로……. 그 2곳 중 하나인 천안영업소가 첫 번째 타켓이 되었다. 영업소 내에서 일을 하던 직원3명과 영업소 내의 도급사 직원은 대략 18명
정도였다.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실직상태가 되었다. 회사에서는 도급사 직원의
상황은 뒷전이었다. 우선은 정 직원이었던 이들 3명의 직원에게 마치 특혜라도 부여하듯이 계열사로 옮기는 것을 제안하였으나 직원들 입장에선 너무도 회사의 부당한 일로 인해 자신들의 처지가 이렇게 되자 거절하였다. 천안영업소가 중심이 되었던 모든 물류의 유통과정이 경기도의 인천, 장호원과 충남의 홍성영업소로 분산되었으며 중부본부의 본거지역시 홍성
영업소로 변경되었다. 사회란 원래 단체의 이익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개인이 손해를 볼 수
도 있다. 하지만 수년 동안 근무해오던 직장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해고를 당했고 이들은 아무런 얘기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한숨만이 나올 따름이었다. 회사에서 제시한 대안은
일생을 가족과 함께 살아온 그들의 터전을 벗어나 생이별을 해야 했으며 기존의 임금과는
상당액이 차이가 나는 월급으로 생활하는 것이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썬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회사에서의 물류비 절감을 위해 폐쇄한 천안영업소는 회사의 생각만큼 절감의 효과를 볼 수 없었고 오히려 매출량과 매출액의 감소는 물론 사양가와 대리점의 불만만 늘어났다.
-승희 씨! 홍성 가서 기죽지 말고 일 잘해
-네. 대리님. 죄송해서 어떻게 해요.
-뭐가. 죄송해. 인희는 나이가 아직 어리니까 괜찮아 바로 자리 잡으면 되고 나도 이번
김에 좀 몇 달 쉬어야지. 승희씨도 알다시피 나 여기 십년동안 근무하면서 제대로 쉬어
본적 없는 거 잘 알잖아. 괜히 부담 갖지 말고. 천안영업소에서 했던 것처럼 홍성에서도
열심히 해. 알았지?! 그리고 이젠 회사 그만 뒀으니깐 대리님이 아니라 오빠라고 불러.
-어우. 됐어여. 무슨 오빠에요. 대리님이죠.
-언니! 정말 김 대리님 말씀대로 홍성 가서 기죽지 말구요 건강해요.
-인희 씨 어떻게 하냐? 김문기 팀장님 말씀대로 홍성에 같이 가면 얼마나 좋아
-아니에요. 저 솔직히 여기 천안에 있었던 것도 이모가 여기 계시니깐 있었던 거죠.
그리고 엄마랑 아빠도 저 홍성에 간다고 하니까 반대하세요.
저도 이젠 집에 들어가서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일하고 싶기도 하구요. 미안해요.
언니랑 같이 가서 일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러길래. 나도 걱정이야. 혼자생활 해 본적 없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여기하곤 많이
다를텐데 어떻게 적응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혹여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드네.
-승희 씨. 처음보지. 여기 부여. 서천 담당하시는 이석준 과장님.
-안녕하세요.
-천안영업소에서 오셨다고요. 천안에 갔었는데 그때 뵌 적 있는데
-그러세요? 그런데 전 잘 모르겠는데요.
-그때 뒷모습만 봤어요. 보니까 무지하게 바빠 보이시더라구요. 그래서 인사도 못하고
왔었거든요.
-아~네
이승희와 이석준의 첫 대면이었다. 특별한 서로에 대한 느낌 없이 그저 직장동료로써
갖게 된 그런 친근한 만남이었다.
-야~!..경선. 어떻게 하냐?
-거기 대리님하고 다른 부장님은 아무 얘기도 안 하냐?
-내가 잘못한 건데 뭐라고 하겠냐. 근데 나 진짜 미치겠다.
-됐어. 네가 알고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그거 쉽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괜히 본사에서 확대시키는 거 아냐?
-모르겠어. 매일 김재국 씨 전화해서 책임지고 농협에 가서 확인 받아오라고 하는데 솔직히
일이 이렇게 까지 되기 전에 내가 먼저 농협 담당자하고 몇 번이나 전화를 했는데도 안
된다고 하는데 무슨 수로 해결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밤에 잠도 안 오고 눈물만 난다.
미치겠다.
천안영업소의 폐쇄로 홍성영업소로 발령이 난지 3개월이 지났으나 승희는 쉽게 적응을 하지
못하고 같은 업무를 하는데도 쉽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조금 있으면 2/4분기
부가가치세 신고일이 다가오는데 거래처인 농협 측과의 세금계산서상의 착오가 생겨 자칫
차후에 불법자료로 판정되어 회사에 큰 손실을 끼칠지도 모를만한 일이었다.
그 일로 인하여 승희는 극도로 예민한 상태로 잠조차 쉽게 들 수 없는 상태로 1달여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