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란 자기가 스스로 만드는 것. 어쩌면 인연이라는 것 역시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다들 바쁘게 살아다가보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처해지는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서 한탄을 하기도 하고 하소연할 곳을 찾아 헤매이기도 한다.
그런 일들이 생길 수록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끔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런 때에 좀더 여유로웠던 혹은 행복했던 한 때를 떠올리며 애써
지금의 불안감을 잊기도 한다.
추억이라는 혹은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곤 한다.
그 중에는 아스라이 쓰라린 아픔과 행복했던 기억을 주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거리를 걸어가면서 그저 지나쳐가는 사람들처럼 아무런 느낌도 감정도 없이
그 이름 하나로 자리만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어린시절에 내겐 불확실하기 그지 없는 미래에 대한 상상과 행복한 듯
우울한 현재와 항상 좋은 것만 떠올리고픈 지난 과거만이 존재했다.
무언가가 내게 찾아오기 전에는 그것에 대한 동경과 이상으로 하루하루가 행복할 때가 있었다. 마치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가는 내일을 기다리면서 느껴졌던 그 흥분감과
마찬가지로 내겐 앞으로 내게 다가올 그 무언가는 그저 흥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난 현재를 살아가고 지난 과거의 아픔을 이겨 내야만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현실이라는 것은 참 냉혹하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가끔 너무 기분이 좋다가도 한순간 그 좋았던 기분이 종이 조각 내던져지듯이
초라해질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매일 매일이 우울하던 내게 동생이 용돈을 준다며
건네준 단돈 몇 만원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니까...
비가 부슬부슬 오는 오후는 이런 저런 망상과 지난 추억들을 떠올리기 안성맞춤이 아닌가
싶다. 이런 날은 주로 집안에 틀어박혀서 시간은 다 보내기가 일쑤이다.
아무 생각 없이 켠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시켜보지만 이내 채널을 돌린다.
한바퀴, 두 바퀴를 다 돌자 텔레비전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듣는다.
자기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이런 행동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마치 자신이 처 놓은 덫에 자신이 걸리길 기다리는 것처럼…….
-어. 승희 씨 어디가?
-저 퇴근해야 해요. 늦었단 말이에요.
-좀 도와줘. 이것 하나만 하면 돼.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께..
-어휴. 참, 과장님. 저 늦었어요.
-미안해. 부탁할게. 회사에서 파워 포인트 잘 하는 사람 승희 씨 밖에 없는 걸 어떻게 해?
-정말 딱 한번이에요. 저번에도 과장님 때문에 약속 못 지켜서 얼마나 입장이 난처했는데요.
-그래. 알았어. 이거 하나면 돼.
년 초인지라 지난 해 실적 분석에 늦은 시간까지 남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지만 채현민 과장은 이승희를 붙잡아 두며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여기 보시면요 메뉴에 삽입이 있잖아요. 거기서 그림 그리고 그림파일을 선택하시면요.
화면상에 작은 창이 하나 또 떠요. 그러면 과장님이 찾고 있는 그림파일이 저장되어있는
곳을 찾아서 선택하시고 확인하시면 그 그림이 파워 포인트에 담겨지는 거예요.
그리고 나머지는 똑같이 반복만 하시면 되고요. 자 됐죠?
-아하. 그래. 이거 별거 아니네.
-이거 저번에도 제가 알려드렸잖아요. 그런데 잊어버리시면 어떻게 해요.
이제 다 된 거니깐 저 집에 빨리 바래다주세요.
-그래. 바래다줄게. 가자
겨울밤의 찬 바람과 사무실 부근의 을씨년스런 분위기에 승희는 서둘러 채현민 과장
차에 오른다.
-과장님은 아직 멀었나봐요? 다른 지역과장님들은 다 하신 것 같던데…….
-좀 바빠서 오늘 다 마쳐야지 뭐
-네. 지역과장님들 할일 무지하게 많겠어요.
-우리?! 그렇지. 본사에서 요구하는 서류 작업 하나에서 열까지 다 해야지.
사양가 방문해서 사료 팔아야지. 대리점 소장하고 티격태격해야지 수금해야지.
발이 모자라지. 그래도 영업이라는 게 매력 있는 직업이니깐 이일 하지.
-그래도 이일 하시면 밤낮 없이 일 하고 집에도 제대로 못 들어가잖아요.
댁에서 뭐라고 하지 않으세요? 아이들도 있는데요.
-어쩌겠어. 내 직업이 이건데.
-그러세요. 저 예전에 다니던 직장 어느 분은요. 결혼 하신 지 얼마 안 됐는데요.
일 때문에 매일 늦게 집에 들어가고 해서 와이프가 더 이상 같이 못 살겠다고 해서 결국
그 분이 회사 그만 뒀어요..
-승희 씨도 알다시피 우리가 그럴 입장인가?
나이도 있지 와이프랑 아이들도 있는데 정말 월급 많이 주고 일찍 퇴근시켜주는
그런 좋은 직장 있지 않는 이상 함부로 옮길 수 없지.
-그건 그렇긴 한데요. 솔직히 저 같으면 우리 회사 지역과장님 같은 분들하고 결혼 못 할
것 같아요.
-왜?
-물론 남들은 이름 있는 겉보기 좋은 회사 다닌다고 하지만 갖은 스트레스 다 받죠.
대리점하고 회사에 낀 중간 아니에요. 그것도 좀 그렇고 매일 집에도 늦게 들어오고요.
제 남편이 그런다면 많이 짜증 날 것 같아요.
-한번 사랑하는 사람 생겨봐. 그런 생각이 조금은 변하겠지. 집이 어디쯤이야?
-저기 화장품 가게 앞에서 세워주시면 되요. 고맙습니다. 과장님 길 미끄러운데 조심해서
가시구요. 발표 자료 빨리 마무리 짓고 댁으로 빨리 가세요. 사모님 기다리시겠어요.
승희를 내려주고 채현민 과장은 일을 하기 위해 한국 사료의 하치장 겸 영업소로 향한다.
-승희 씨 고마워. 승희 씨 덕에 발표 자료 다 만들었거든.
-별 말씀을요.
-내가 나중에 저녁 한턱 살께.
-정말이시죠!
추운 날씨지만 오래간만에 전 지역과장과 영업소 직원이 모여 회의하는 시간은 화기애애하기 만하다
-참. 승희 언니 그 얘기 들었어요?
-뭐?
-우리 지역과장님 중에 어떤 분 당뇨병으로 병원에 입원 하셨데요
-그래? 누군데? 지역과장님들 다들 멀쩡하시지 않나?
-저도 잘 모르겠어요. 홍성영업소에 있는 신희 언니한테 들었어요.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