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이별을 감행했던 내 스물의 기억은, 밤낮없이 스멀스멀 내 살갗 속으로 스며 들었다. 그의 말을 빌자면 "네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는 게 내겐 숨쉬는 일과도 같다" 그렇다. 내가 그에게 대단한 존재 였는지 모른다. 그를 죽일 수야 없는 일 아닌가? "아니 별로,.. 나가자. 이제 끝났어." 그는 앞장을 서서 종종 걸음으로 어딘가 가고 있다. 나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걷는다. 앙상하기만한 가로수들의 한 겨울 나기 만큼 나의 오늘 또한 힘들고 고단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한번 즘은 돌아 봐 주길 바라고 또 바라는데,, 이제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의 어깨너머로 잘 익은 노을이 보인다. 표현을 할 수 있는 단어를 아직 찾지 못했다. 붉고, 푸르고, 희고 잘 그려진 한 폭의 수채화 같다고 나 할까? 오늘 석양은 괜시리 처연해 보인다. 빛나는 노을,,, 그리고 무지개.. "미리네"라고 쓰인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지금도 숱한 학생들의 보금자리 같은 느낌이 살풋 든다. 울렁거리는 음악과, 매캐한 담배연기가 가득하고, 낮은 수다가 이어지고, 벽마다 날림의 낙서들이 갑자기 그때를 연상시킨다. 우리는 구석 자리로 가서 앉았다. 마치, 할머니의 이야기 보따리를 기다리는 어린 손녀가 된듯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참 잘생겼네' 그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넓고 단정한 이마며, 굳은 인중, 짙은 눈썹과, 꽉 다문 입매까지도.. 그의 변화는 짧은 머리에 있었다. 늘 치렁치렁 길러 한번 즘은 잘라 주었으면 하던 그의 머리카락, 그때도 지금도 근사하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을 자르는 그의 한마디가 날카롭게 마음을 후벼판다. "잘 지낸다고 들었어. 넌 역시 그렇게 잘 지내고 있었구나" 누군가 나의 소식을 그에게 날라다 준것 같다. '현정일까?'하고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현정이다. 그녀는 비단같이 검은 머릴 길게 기르고, 모직의 붉은 하프코트를 입고, 무릎을 다 가릴 것 같은 긴 부츠를 신고 있었다. 큰 키와 시원한 목이 잘 어울리고 있었다. "영은이 왔네. 너 꼭 올 줄 알았어. 진이 참 많이 기다렸거든, 기집애. 왜 연락 안했니? 늘 기다렸어." 현정이 내 소식을? 갑자기 웃음이 터질 것 같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내가 불렀어. 괜찮지? 너희 오래 못 봤잖아. 할 말 많을 거야." 진의 입이 움직일 때마다 현정의 시선이 얇게 흔들리고 있었다. 현정은 지금도 진을 관찰하고 있는것이다. 그의 모든 것에 쐬기를 박듯이 한땀 한땀 정성껏 그를 자기 품으로 안고 있는 것이다. 내가 현정을 잃은 것이 아니라, 현정이 진을 얻은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비극이자, 또 다른 선택이었다. "오랜 만인데 술이라도 한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게 몇년 만이야?" 현정은 변한 것도 같았다. 그녀의 침착함과, 흐르는 물같은 성격은 화기애애하고 다정하게 변해 있었다. 시대의 흐름에 나만 비켜서 있었던것이다. "그래, 그런데 담에 하자. 오늘 저녁 비행기를 예약했거든. 미안해" 나는 어쩌면 바보같고, 멍청하고, 들떨어진 인간이 되어 버린것 같다. 여기에서 섞이지 못하고, 저기에서도 겉도는 한마디로 기름같은 인간. 진의 얼굴에 순간 낭패감이 보인다."왜 밥이라도 먹고 가지, 야 친구끼리 밥 한끼도 못하냐?" "미안^^"나의 엉뚱하고 어리석은 기대는 이즘에서 끝났다. 그의 귀국과, 현정의 만남. 나는 또 낯설은 거리를 혼자 헤매이는 것처럼 어쩔 줄 몰라한다. 그와 현정,,,무슨사이가 된걸까? 칠년을 기다린 나의 보람은 그의 성공적인 전시회가 끝이란 말인가? 어렵고 또 어렵다. 내가 모르는 것과, 내가 알아야 하는 것 사이에서 어렴풋한 두려움이 생긴다. "그래, 공항까지 내가 바래다 줄께." 진은 자리를 일어서며 내 눈을 피한다. "그래. 섭섭하지만 어쩌겠니? 우리가 한번 가든지 할께. 이제 알았으니까." 우리? 현정의 입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거침없이 나왔을때 나는 울고 싶어 졌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현정아, 다음 에보자" 나는 생뚱맞은 인사를 하고는 얼른 차에 올랐다. 그에게 최소한의 변명은 들어 줘야 하니까. 어쩌면 변명을 들어 주고 할 사이도 아니었다. 나 혼자의 오랜 착각은 고단한 병으로 자릴 잡았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정리되지 않은 일 들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 그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운전대를 잡고 있다. 어설픈 침묵을 깨고 무슨 말인가를 해야하는데.." 그림 좋더라, 야 독고 진 보석을 옆에 두고 몰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