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그 날 나는 길거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려졌다.
누군가 착한 행인이 경찰에 연락을 했고 난 병원으로 실려왔다.
내가 쓰러진 지역은 한일 병원에서부터 2시간이나 떨어진 낯선 거리에서였다.
얼마나 헤메고 그 곳까지 갔었는지 나는 몰랐다.
나는 가방을 잃어버렸고 누군가가 내 카드를 150만원이나 긁어댔고, 이틀을 병가를 내었다.
사장은 뭔가 엉뚱한 상상을 하며 나를 문병왔고 명이는 병실로 찾아와 말없이 몇 시간을 앉아있다 갔다.
퇴원후 영철이를 통해 그의 장례소식을 들었다.
부모님은 기도원에 들어가셨고 그동안 이혼준비를 하던 그의 아내는 이미 사망으로 처리되었기에 별다른 과정을 밟을 필요 없었다고, 그의 어린 딸과 함께 친정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근데 연우야, 너 한테 이런 거 말하면 나중에 니가 나를 가만 안둘거 알지만. 아, 나도 모른다고 거짓말하는게 한계가 있어서 말이야."
전화기 넘어 그는 아마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있을 것만 같이 난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 우리도 이젠 나이 먹었잖아. 왠만한 건 잘 안 놀래. 말해봐."
"실은 이삭이 와이프가 나한테 물어보더라구. 그 날 병원에 온게 우연우씨 맞냐고? 이름까지 딱 말하는데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어. 그러더니 이멜 주소를 물어보는 거야. 난 모른다고 그랬더니 그러더라고. '아, 동호회 주소록에 나와 있겠군요.' 하더니 전화를 끊더라구...별다른 메일 없었냐?"
"아니.. 얘기해 줘서 고마워. 다음에 연락하자."
"야, 연우야,잠깐만..."
폴더를 채 닫기전에 그의 목소리가 다시 튀어나왔다.
"저기... 너 행여 이상한 마음 먹지마라, 야, 첫사랑 없는 사람없고 그런 거 그냥 과거의 추억인데 박박사 이렇게 갔다고 괜히 니 책임이라고 책망하지마, 너 강한 듯해도 꼭 마음이 여린 구석이 있어서 우리 모두 다 걱정하고 있다. 사실 우리 친구 몇녀석이랑 이삭이 가기 전에 모여서 술 한잔 했었는데, 그 녀석이 그러더라구. 아내랑 정리하면서 연우 너 기다린다고. 난 그랬어. 미친놈이라고..그 놈 맘이 진심이었어도 그건 너 때문이 아니라 그 놈 마음 문제니까, 너가 괜히 마음 괴로워 할까봐... 듣고 있어?"
한숨이 나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나도 어쩔 수 없던 그의 마음.
이런게 우정인지 뭔지 모호했지만 영철이의 말은 진심이라 여겨졌다.
"걱정하지마.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맙다. 끊을께..."
메일을 열어본건 일주일만에 처음이었다.
편지함에 사용량에 거의 다할 만큼 많은 메일이 와 있었다.
대개가 거래처나 고객에게서 온거였다.
하나하나 지워나가다 손끝이 짜릿해졌다. 거기에는 박이삭의 이름으로 발신이 되있는 '제목없음'의 메일이 와있었다.
: 나 누군지 알거에요. 우연우씨.
아니, 우연우.
넌 비겁했어. 넌 그날 그렇게 병원을 빠져나가지 말았어야 했어.
나와 우리딸을 만나서 사죄하는게 너의 최소한의 양심이었어야 하지 않을까?
넌 내 남편을 끝까지 사랑하지 않았잖아, 너 그렇게 잘났어?
니까짓께 뭔대 우리 애 아빠가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데도 아무런 대답을 안해준거야?
그게 이삭씨를 죽인거야. 너는 살인자야.
우리 딸, 아빠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너 때문에 나와 우리 불쌍한 딸은 이런 불행을 겪는거야.
너는 무책임해.
예전에 서로 사랑했다면 넌 남편을 떠나지 말았어야했어.
그렇게 사랑했다면서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는 너와 내 남편은 사랑이라는 걸 할 자격도 없어.
난 교회에서 이삭씨를 처음 봤을때부터 너무 사랑했어.
주일마다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한가지만으로 나는 하나님밖에 모르는 신실한 소녀로 인식되었지.
내가 얼마나 남편을 기다렸는지 너같이 쉽게 떠난 사람은 알 수 없을거야.
애아빠는 항상 너 때문에 힘들어했어. 넌 상상도 못할거야.
난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공부도 열심히 했지.
입학식이 있던 날 내 마음을 고백하려고 그의 집앞으로 갔을떄 난 너와 그사람이 골목길에서 입맞추는 걸 봤어.
너는 유유히 작은 승용차를 타고 사라지더군, 그 날 너의 미니스커트와 핑크색 구두가 내가 널 기억하는 유일한 거였지.
난 너의 얼굴을 못봤지만 질투에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큼 널 미워했어.
하지만 그 날 너의 모습을 보고는 나는 더 분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넌 그저 평범한 아줌마일 뿐인데 남편이 나를 버리고 너를 선택했다는게 용서가 안돼.
그러다가 처음으로 남편은 교회에 나오지 않았어.
난 2학년이었고 그가 너와 헤어졌다는거 알았지.
목사님을 졸라 맞선아닌 맞선을 보고 난 학생 신분으로 결혼을 했다.
그이는 그냥 우연인줄 알고있었지만, 난 정말 오랜 시간을 그사람을 기다렸던거야.
얼마나 우리 딸이 이쁜데... 아빠를 꼭 닮았는데...
하지만 너는 졌어.
우리가 이혼할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 애아빠는 영원히 내 남편으로 이세상을 떠났기에 난 영원한 그의 아내이고 너는 그저 인생을 실패한 이혼녀일뿐이야.
넌 결국 그의 사랑을 영원히 얻을 수 없어.
이제 더 이상은 그의 인생에 끼워들 수 없는 너를 나도 인정치않아.
내 남편은 더 이상 너를 사랑할 수 없으니까.
첨부화일에는 그와 아내, 딸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실려있었다.
그녀의 메일은 그렇게 끝나있었다.
책상에 엎드려서 머리를 바닥에 대었다. 소리를 내서 울 수 없었다.
인생이 비껴가는 이상한 철로위에 놓여있던 우리 모두가 불쌍했다.
그 쪽은 아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컸던 것인지 짐작도 못하고 떠나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보다 지난 후에 사랑임을 아는 것이 더 가슴아프다고들 하지만.
정작 우리를 가슴아프게 조차 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동안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뒤로하고 떠나가는 사람일거였다.
눈물은 작은 연못이 되어 새로운 프로젝트의 평면도를 적시고 있었다.
우리는 슬퍼할 시간조차 삶의 조각이 되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