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하루 종일 고민에 빠져있었다. 학교를 가긴 가야겠는데 재현이와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 할 텐데 정말 어떻게 표정관리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도 열렬한 나의 학구열에 힘입어 학교는 갔다. 버스에서 내려 다른 아지트인들과 수다떨며 강의실로 가는데 누가 뒤따라옴을 알았다. 곁눈으로 보니 역시나 재현이였다.
나를 배려라도 하듯이 그냥 한 번 씨익 웃고는 모른 척 지나쳤다. 정말 다행이었다. 인사라도 했으면 아지트인들에게 눈총을 받았을 터인데.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강의실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재현이가 나를 반겨 인사했다. 그리고는 내 뒷자리에 떡하니 앉았다. 그리고는 뒤에서 조용히 얘기했다.
“니 내가 매일 학교오는거 지켜본 거 아나?”
“나를? 왜?”
“그냥 너에 대한 건 다 알고 싶으니까.”
“...”
우리의 대화를 지나가며 얼핏 들은 또래 남학생이 귀가 번쩍 뜨였나보다.
“너그들 반말로 얘기하나? 우와! 언제부터 그랬는데?”
그 소리에 다른 또래들도 우르르 몰려와서는 억울하다는 듯이 나에게 따져들었다.
“왜 재현이한테만 말을 편하게 놓을까?”
“이상하네~”
약간 놀리는 투로 이제부턴 자기네들과도 편하게 지내자며 얘기했다. 어쩔 수 없었다. 아지트의 엄중한 규칙이 떠올랐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기에 또래에게는 말을 놓기로 했다. 그들은 그동안 어려워했던 나에게 봇물 터지듯 말을 걸어왔다. 참 궁금한 것도 많았다. 심지어 내가 매일 듣는 음악을 자기도 한 번 들어보고 싶다며 이어폰을 낚아채 가기도 했다.
재현이는 계획이라도 세웠는지 하루에 한 걸음씩 나에게 다가왔다. 그 때마다 단호히 거절하는 나의 태도에 금새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 다음날이면 또 웃으며 다가왔다. 하루는 그가 이어폰 한 쪽을 건네며 들어보라고 했다.
“락 음악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
“난 락 싫어하는데. 주로 클래식 아니면 팝송 조금 듣거든.”
“락이라고 다 시끄러운건 아니거든. 함 들어봐라. 좋다.”
항상 거절만 했기에 그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이어폰을 받아 들었는데 귀에 꽂자마자 깜짝 놀라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하필 그 때 시끄러운 곡이 나와 내 귀를 놀래켰던 것이다.
“와~ 미치겠네. 이 곡 말고 다음꺼 들어봐라.”
그가 다시 권했지만 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 토요일만 되면 나를 아주 귀찮게 했다. 토요일은 주로 실험이었기에 조금 외진 곳에 떨어져 있는 실험실에서 수업을 듣는데 주변 탓인지 분위기가 묘해진다. 숲은 아니지만 나무들 사이에 실험실이 자리잡고 있어 왠지 아담하고, 함께 있는 사람들과 좀 더 친밀해진 기분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들에게도 그런 감정이 느껴지는지 토요일만 되면 모두 괜히 싱글거린다.
재현이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른 조가 되었다. 하라는 실험은 안 하고 마치 나를 감시하듯 수시로 우리 조를 응시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고는 다시 실험하고, 난 누가 봤을까 무안해져 고개만 숙이고... 실험이 끝나면 어김없이 기다렸다가 말을 걸어왔다.
“오늘 하루만 내하고 보내면 안 되나?”
“재현아. 제발 이제 그만 하면 안 되니?”
“내가 싫나? 왜 자꾸 나만 피하는데?”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얘기했잖아. 아지트...”
“정말 그거 뿐이가? 내가 싫진 않나?”
“넌 좋은 애야. 멋진 남자고. 하지만...”
“그럼 그냥 내랑 확 사귀뿌자.”
“나 이만 가볼께.”
뒤돌아 바삐 걷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정말 그에게 미안했다. 마치 그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는 거 같아 마음이 아팠다. 스무살이면 여자고 남자고간에 한창일 땐데...
어느 덧 2학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재현이의 작업(?)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후딱 지나가버린 느낌이었다. 매번 나의 단호한 거절에 그도 지쳐가는지 기말고사를 앞둔 요즘은 조금 뜸했다. 요즘 그뿐만 아니라 학과 분위기가 많이 침체되고 어두웠다. 2학기 막바지에 이르자 또래나 한 두 살 많은 남학생들이 하나 둘 없어지기 시작했다. 없어질 때마다 송별 술자리가 마련되고 물론 난 참석할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작별인사는 모두 받았다.
“예진아. 니 졸업 천천히 해라. 내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올께.”
약간은 장난끼 섞인 어투로 얘기했지만 도살장에 뭐 끌려가는 듯한 모습은 감춰지지 않았다. 기말 고사때는 모두 출석해 시험만 치르고 쏜살같이 없어졌다. 인생 다 산 모양으로 얼굴엔 웃음 하나 없었다. 재현이도 얼굴이 많이 어두워 보였지만, 나 때문인지 기말 고사 때까지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나를 대함에 힘이 빠지긴 했어도 포기하진 않은 듯 하루도 빠짐없이 나에게 접근했다.
2학기가 끝날 무렵 또 변한 모습이 있다면 비밀리에 한 쌍의 학과 커플이 탄생한 것이다. 벌써 깊은 관계인 것 같았다. 모두 쉬쉬했지만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나 빼고 세 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은 커플이 되어 학교는 멀리했고, 한 명은 주간 반으로 옮겼고, 나머지 한 명은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학교도 간간이 나왔다. 이때껏 그래왔듯이 강의실에선 홍일점으로 자리를 지켰다.
기말고사만 치르면 또 긴 방학이다. 여름방학 때 장만한 삐삐는 여전히 잠자고 있다. 혹시나 재현이가 메시지라도 보낼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한 통도 오지 않았다. 분명 내 번호를 알고 있을 텐데 실험조의 자료 연락 외엔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기말 고사는 평소에 준비한 덕분에 무사히 잘 치렀다. 마지막 날 종파티가 있었지만 여전히 난 참석할 수 없었다. 아지트의 규칙때문에...
혼자 터덜터덜 아지트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 듯 탕탕 소리를 질렀다. 아지트에 대한 불만인지, 아지트를 스스로 택한 내 자신에 대한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아~ 긴 방학은 또 뭘하며 지내노...”
이번 방학은 왠지 누군가가 많이 그리워서 더더욱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날 포기하지 않겠다던 그 누군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