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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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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마음을 보여줘


BY 영원 2003-10-08

 

그가 갑자기 멈춰 서는데 나는 흠칫 놀라 벽 쪽으로 물러섰다.

“왜? 내가 무섭나?”

“조금... 대체 왜 그래요.”

“왜 다시 존댓말 하노?”

“아까는 얼떨결에 튀어나온 말이고...”

끝을 얼버무리자 그는 그냥 서로 편하게 얘기하자고 했다. 좀 전의 실수도 그렇고 난 그냥 처음으로 남자에게 반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무너지면 이젠 끝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선 도저히 존댓말을 계속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또래에게만 말을 놓자. 설마 무슨 일 나겠어?’


그는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나랑 조금만 잠깐만 얘기 좀 하자.”

“내가 아까 도서관 갈 때 아지트에 대해서 얘기했잖아.”

“거기서 나오면 되잖아.”

“내가 왜? 이러면 내가 정말 곤란해져.”

“잠깐 얘기하는 것도 안 되나?”

“제발 나 좀 보내줄래?”

그는 강경했다. 벽 쪽으로 몰려있는 나에게 그는 한 마디 할 때마다 한 걸음씩 다가왔다. 난 더 이상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친한 친구와 대화하듯 그는 벌써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얼굴은 달아오르고 심장이 마구 뛰고 있음을 느꼈다.

“예진아. 나 ...”


“잠깐만! 좀 떨어져줄래?”난 깜짝 놀라며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 때 지나가던 아지트 선배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예진아? 너 여기서 뭐해?”

“네? 아니... 자료 좀 받을게 있어서.”

“그래? 다 받았음 같이 가자. 차 올 시간 됐어.”

“네.”

그리고 재현이에겐

“내일봐요.”

아지트 선배가 있기에 존댓말로 인사 한 마디하고는 뒤돌아 선배를 따라 나섰다. 몇 걸음 걷다가 살짝 뒤돌아보니 아직도 재현이는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뜨끔하여 걸음을 빨리했다. 가면서 선배는 예상대로 나에게 따끔한 충고 한마디 했다.

“너 조심해라. 전에도 그런 비슷한 상황 있었다. 물론 아지트를 떠났지.”

“아니 난 싫다는데 그 사람이 자꾸 못 가게 막잖아요...”

“알아서 잘 처신해야지. 그리고 평소에 잘 행동해. 요즘 네 외모가 많이 변했다는 말 돌고 있다.”

“네.”


아지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몸은 피곤했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재현이가 하려던 말이 뭐였을까?’너무 궁금했다. 그리고 그에게 그렇게 밖에 대할 수 없음이 괜스레 미안했다. 분명 나의 마음도 그에게 호감을 표하는데 겉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처지가 너무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드디어 나도 아지트를 떠날 때가 왔단 말인가... ’


‘재현아. 미안해. 나도 너를...’

그 다음 날 난 강의실에 들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그와 마주칠까 쉬는 시간에도 책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나가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이젠 마지막 수업인데 한시름 놓였다.

마음놓고 마지막 수업을 듣는데 뒤에서 무슨 쪽지가 휙 날아들었다. 내 옆 사람들은 키득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너무 창피해 쪽지를 펼쳐 볼 수도 없어 주머니에 찔러 넣어두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강의만 열중해 듣는 척 했다. 나의 태도에 재미없다는 듯이 그들도 다시 강의에 열중했다. 하지만 나는 수업 시간 내내 주머니의 쪽지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교수님이 강의실을 나가기가 무섭게 쪽지를 펼쳤다. 물론 다른 사람들 몰래. 예상대로 재현이었다.


<수업 후 강의실에 남아줘. 나 너한테 할 말 있다. 그냥 가면 네 회사 버스까지 찾아간다. -재현- >


거의 협박조였지만 나의 가슴은 설레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 사실을 다 아는지 나가면서 일부러 내 옆을 지나가며 한마디씩 던졌다.

“잘 해봐라.”

“우와.”

“좋겠네.”

또 나이가 조금 있는 선배는 유치하게 “얼레리 꼴레리. 누구누구는 ...”하며 큰 소리로 웃으며 나갔다.

정말 너무 창피했다. 그냥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아 있을 수도 없고 너무 난처했다.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기라도 하듯이 강의실은 텅 비어버렸다.  난 앞자리에 꼼짝않고 앉아 있고 그는 뒤쪽 창문에 걸터 앉아있었다. 모두 다 나가자 그는 강의실 문을 잠갔다. 난 ‘딸각’잠그는 소리에 더욱 긴장되었다.

‘오늘 무슨 일 나는거 아냐? 어쩌지?’잔뜩 긴장되어 얼굴도 굳어있는 나에게


“나 너 좋아한다. 처음부터 좋아했었어. 그 동안 쭉 너를 지켜만 봐왔다.”

“...”

“내가 무섭나? 왜 문 잠가서?”

“응. 조금...”

“난 너 생각해서 잠근건데 너네 거기 사람 들어올까봐.”

“응. 그래?”

“넌 나 안 좋아하나?”

“응.”

단호한 나의 대답에 그는 약간 따지듯이 물었다.

“그럼 왜 나한테 도서관에 같이 가자고 했는데?”

“그건 그냥 너가 전자과 졸업했다기에 그리고 또래니까...”

“그거 외엔 아무것도 없나?”

“응.”

그는 좀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표정을 바꾸곤

“예진아. 내 니한테 잘 할께. 나랑 사귀자.”

“안 돼. 너가 좋은 애라는건 알지만 아지트의 규칙 때문에 난 누구도 사귈 수 없어.”

“그냥 확 나오면 안 돼나?”

“응. 내가 원해서 간 곳인데 나오면 안 되지.”

“그럼 당분간 몰래라도 아니 나랑 얘기만이라도 하면 안 돼나?”

“어제처럼 또 걸리면 난 끝장이야. 미안해. 안 돼.”

“...”

그는 나의 단호함에 약간 풀이 죽었다.

“나 가도 되니?”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

“그래도 나 너 포기 안한다.”외치고는 그가 먼저 휙 나가버렸다.


난 잠시 문앞에 서서 멍하니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재현아 미안해. 넌 정말 멋있는 녀석이야. 나도 널 좋아해. 하지만 난 규칙을 어길 순 없어.’

나의 마음은 그를 원하지만 겉으로까지 규칙을 어길 순 없었다. 아지트에서 이중생활은 더더욱 큰 죄인줄 알면서도 난 이제껏 내가 믿어온 아지트를 버릴 수 없었기에 일단 겉으로라도 아지트인의 모습을 갖춘 후 속을 다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 날 밤 난 기도실을 찾아 나약한 나의 모습을 고하고 그래도 내 마음을 이기지 못함에 한없이 울었다.


“신이시여. 죄송합니다. 신이 원하시는 모습이 이게 아닌데 작은 유혹에도 무너지는 나약한 인간을 용서하소서......(중략) 그리고 재현이에게 상처를 주어서 죄송합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라도 안 되겠습니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하고 다시 신께로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기도를 하며 끝내 갈등을 풀 수 없음에 숨이 탁탁 막혔다.


“앞으로 난 무엇을 택하고 따라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