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생들의 뜨거운 학구열에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들 옆을 지나치며 무슨 책인가 보았다. 전공과 토익 책들이었다. 사실 전자공학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난 솔직히 전공이 시작되는 2학년이 되는게 두려울 정도다. 나도 뭔가 준비를 해야되는데 뭐부터 시작해야 할 지도 모르고 도움 줄 사람도 없고 정말 난감하다. 순간 나는 그동안 꽤 가까워진 김재현을 떠올렸다.
‘그래 그는 전자과를 졸업했으니까 잘 알거야. 그냥 아무 감정없이 도움만 요청하는거야.’
이렇게 마음을 다부지고 그에게 부탁을 했다.
“저기~요. 제가 전공의 기초가 되는 책을 구하고 싶은데 뭘 봐야 될지 모르거든요. 내일 수업 전에 도서관에 좀 같이 가 주실 수 있으세여? 쉬운 책 추천 좀 해주세요”
“응? 그래.”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얼굴도 못 쳐다보고 물었는데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흔쾌히 대답했다. 그의 그렇게 밝은 얼굴은 첨 봤다.
수업마치고 여느 때처럼 아지트로 돌아와 자려는데 내일이 은근히 걱정됐다. 내일 그와 함께 도서관에 갈 생각을 하니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지트인들의 눈에 오해를 살까 걱정이 되었다. 분명 오해하고도 남을 일인데 ... 최대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학교 가기 전 입고갈 옷과 화장에 신경이 쓰였다. 그를 의식해서인가?
학교에 도착하여 그에게 눈짓으로 가자는 사인을 보냈다. 그는 웃으며 일어나 뒷문으로 나는 앞문으로 나와 건물에서 빠져나오기까지 떨어져 걸었다. 도서관에 가는 동안 난 어쩔 수 없이 사정 얘길했다. 김현민씨에게만 말했던 아지트에 대한 얘기를.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이내 상관없다는 말을 했다. 그는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도서관에 들어서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전자공학 관련 책장을 찾아 여기서 찾아보라고 조용히 얘기했다. 도서관이어서 무척이나 조용했기에 구두소리조차 조심하고 목소리도 낮춰 얘기했다. 좁은 책장 사이에 들어서 많은 책들을 보자니 제목만 보고는 어떤게 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저기 추천 좀 해 주세요. 가장 쉬운 걸로...”
그는 알았다며 내 뒤쪽의 책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그 정적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숨소리가 무척 거칠어짐을 들을 수 있었다. 돌아보니 얼굴과 귀까지 벌게져 있었다. 숨소리가 크다 못 해 이젠 한숨까지 간간히 내쉬었다. 그가 돌아서서 내 앞쪽의 책들을 같이 훑어볼 때
“어디 아프세요? 왜 그러세요?”
내가 물었지만 그는 대답도 못 한 채 얼굴이 더 빨개졌다. 싱글벙글 웃으며 갔다가 강의실로 돌아오는 길엔 얼굴만 벌게져 아무 말 없이 앞서 걸었다. 강의실에 거의 다 와서 난 그에게 또 부탁을 했다.
“저기~요. 이 책 재현씨가 들고 들어가면 안 될까요? 제가 들고 가면 사람들이 비웃을 까봐...창피해서...”
“응. 알았어.”
책만 건네받고는 또 재빨리 뒤돌아 걸었다.
그 날 난 뒤통수가 무척이나 따가움을 느꼈다. 아까 그 일이 있고 나서는 그에 대한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에 거슬렸고 도서관에서 들었던 그의 숨소리가 자꾸만 들리는 것 같았다.
‘왜 이러지? 그냥 도움만 받은건데. 아무 감정없이.’
수업 내내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오늘은 수업 끝나고 공부하지 말고 바로 가야될 것 같았다. 꼭 무슨 일이라도 생길것만 같아서 뭔가 불안하고 초조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빠져나오는데 누가 내 팔을 확 낚아채고는 나를 뒤돌아 세웠다. 순간 당황하여 “엄마야!”한 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예진아. 나랑 얘기 좀 하자.” 그였다. 김재현. 얼굴엔 비장함까지 돌았다. 뭔가 폭탄 선언이라도 할 듯한 얼굴로 나를 끌어당겼다.
“저 할 말 없는데요.”
당황함에 난 아무 생각없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나랑 잠깐만 얘기하자. 나 할 말 있거든. 그리고 이젠 말 좀 놓아라! 또래끼리 누구씨, ~요가 뭐고?”
큰 소리로 명령하듯 얘기하는 그에게 약간은 오기가 생겨 나도 모르게
“난 할 말 없는데. 그리고 나 이러면 안 되거든!”반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는 나의 반말에 한 번 씨익 웃고는 내 가방을 낚아채 조용한 복도로 나를 이끌어갔다.
“난 할 말 없어. 이거 놔! 나 이러면 안 된단 말야.”
이 말만 반복하며 뭐 끌려가듯 질질 끌려갔다.
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멈춰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