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덧 중간고사가 다가왔다.
‘대학교 중간고사는 어떤 식으로 치러질까.’ 처음이어서인지 무척이나 긴장됐다.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는 했는데 다른 학우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불리한 조건이라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항상 피곤과 시간에 쫓기는 나였기에.
드디어 시험 전 날 밤.
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니 생각조차 못 했다. 분명 다음 날 회사 일에 지장이 간다는 것을, 그러면 아지트의 규칙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공부 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제 1시간만 지나면 학교 갈 시간이다.’아지트에서 학교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 또 시험시간 전까지는 30분 정도 여유가 있고, 차에서 멀미만 하지 않는다면 시험범위를 한 번 더 훑어 볼 수 있다는 계산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잘 봐야 되는데...나의 체면유지를 위해서도.’일하면서도 계속 어젯밤 적어둔 쪽지를 기계에 붙여두고 틈 날 때마다 보았다.
드디어 학교 도착. 강의실엔 고개 숙인 학생들만 가득했고 조용했다. 책상에 뭔가 열심히 적는 학생도 있고, 서로 물어보며 공부하는 학생도 있고 모두들 열심이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앞에 앉아있던 핸섬맨 김현민씨가 “커피 한 잔 안 할래?”하고는 여유를 부렸다.
“아뇨. 저 공부해야 돼요. 아저씬 많이 하셨나 봐요?”하며 거절해 버렸다.
그 때 커피맨 박덕만씨가
“공부 많이 했지? 매일 공부만 하던데.”하며 커피 한 잔을 책상에 올려주었다. 주위에서 ‘와~’하고는 놀렸지만 내 귀엔 잘 들리지 않았다. 이제 몇 분만 있으면 ‘주관식 서술’이라는 대학 중간고사를 보는데 그런 말들이 귀에 들려올 리 없었다.
“자 모두 책 덮도록!”
드디어 시험 시작이다. 어떤 문제가 나올지 너무 궁금하고 떨렸다.
시험지를 보는 순간 난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헤에~ 내가 공부한 내용들이다.’정말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 기본 뼈대에 살을 덕지덕지 붙여서 화려하게 꾸며 적었다. 앞뒤로 빼곡히 적은 답안지를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볼펜을 내려놓았다.
‘어? 나랑 커피맨밖에 없네.’조금은 쑥스러웠다. 내가 먼저 답안지를 제출하자 박덕만씨도 따라 나왔다. 강의실밖엔 다음 과목 공부하는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아예 포기한 학생들도 몇몇 보였다. 그들은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담배만 연신 피워댔다. 하루에 두 과목씩이어서 한 과목만 보면 오늘은 끝난다. 20분간의 여유시간. 좁은 복도에 학생들이, 그것도 남학생들이 모두 나와 있으니 난 파묻혀 있듯 끼어 구석에 서서 책을 들여다봐야 했다.
“뭘 그리 많이 적었니? 공부 많이 했나보네~.젤 늦게 나오고.”하며 김현민씨가 옆으로 다가오는 순간
나는“엄마야!”소리치고는 가슴이 콩닥거림을, 그리고 김현민씨의 가슴팍이 눈앞에 있음을 알았다. 남학생들 사이에 간신히 끼어 벽쪽에 서 있는데, 누군가 복도를 지나가려고 사람들을 밀며 헤쳐 나가는 통에 김현민 씨가 내 앞으로 바짝 밀린 것이었다.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귀까지 벌게져 어떻게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보고 있는 눈들이 많기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와아~!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썸씽! 썸씽! ”, “C.C(캠퍼스 커플)”여기저기서 웃으며 놀려댔다.
벽을 미는 듯한 자세로 서 있는 김현민씨는
“저기~ 괜찮니? 예진아? 미안해. 저기 밀려서~...”하고는 미안해하며 물었지만 난 고개를 숙인 채
“네.”하고는 재빨리 강의실로 들어와 버렸다.
‘그래 아무 일도 아니야. 안긴 것도 아니고 그냥 가까이...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뭐.’ 내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며 침착해지려 애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공부하려 했지만 좀 전의 상황이 자꾸만 떠올라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벽과 김현민씨 사이에서 맡았던 그의 향기도 떠올랐다. 향수는 아닌데 좋은 향기가 났다.
‘그의 체취인가...’
‘ 앗!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나도 모르게 나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나는 교수님이 들어오신 후에야 남은 시험이 떠올랐다. 쉬는 시간에 소동으로 마무리 공부는 못 했지만 다행히 문제는 쉬웠다. 답안지는 빨리 작성했지만 젤 늦게 제출했다.
‘아무도 없겠지. 제발 제발...’강의실 문을 빼꼼히 열고 복도를 내다봤다.
‘휴우~ 없다. 강의실에서 공부하다 가야지. 도서관엔 자리 없을 테니...’다행히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책상에 앉은 나는 내일, 모레, 글피까지의 시험을 생각하며 아까 일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아지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싶었지만 누구에게 털어놔야 할지 마땅한 친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모두가 아지트인이어서 여차하면 ‘아지트 퇴출’ 당할 수 있는 그런 화젯거리를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우연히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나의 양심은 떨렸기에 이미 아지트의 규칙은 어긴 셈이라는 걸 내 자신이 안다.
‘아! 아까 그 기분은 좋았는데...아지트 규칙... ’
처음으로 내가 아지트인이 된 걸 후회 비슷하게 해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시험이 아직 남았기에 시험 공부에 밀려 짧게 끝낼 수 밖에 없었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남은 시험도 기분좋게 답안지를 제출할 수 있었다. 마지막 시험까지 완전히 끝난 후 난 긴장이 확 풀리는 동시에 고민이 시작되었다. 며칠 전 있었던 소동이 못내 양심에 걸리는 것이다. 처음으로 아지트인이 된 걸 후회하기까지의 상황과 나의 마음 변화를 계속 짚어보며 나도 모르는 나의 진심을 발견하고 싶었다. 순간 아지트를 떠난 이들의 말이 떠올랐다.
‘한 번이라도 아지트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면 그 사람은 언젠가 꼭 아지트를 떠나게 되어있다’며 경고하듯이 말하며 떠난 그들의 말이 고민하는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설마 나도 그럴까? 그래도 난 아지트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모범생인데.’라는 생각과 학교만 가면 즐거워지는 내 자신의 모습이 엇갈리며 혼란스러웠다.
‘이런게 대학 생활이구나. 4년 내내 고민하고 방황하며 이겨내야 된다는 어려운 대학생활.’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실제 대학생만 되면 아지트를 많이 떠났다. 평소에 아지트 모범생이었던 사람들도 부지기수로 떠났다. 나도 그 들 중의 한 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내일부턴 다시 아지트인으로 돌아가 열심히 살아야지. 정말 학교에선 공부만 해야지!’하고 결심했지만 솔직히 내 맘 한켠엔 가슴 설레던 그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