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하고 1주일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갔다. 첫 수업 때는 정말 진땀 뺐다. 고향이 충청도인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알아듣기 힘들었는데 교수님까지 사투리를 쓰실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과목 내용도 어려워 정신없는데 사투리까지 섞으시니 도대체 뭐라 하시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쉬는 시간이면 정신이 아예 나가버렸다. 강의실 가득 메운 경상도 사나이들의 수다에 귀가 멍멍해질 정도였다.
아지트에서 학교까지 회사버스를 운행해 준다. 끝나고도 마찬가지로 아지트로 데려와 준다. 버스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서면 하나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다름 아닌 복도. 남학생들로 가득 찬 복도. 마치 내가 모델이라도 된 양 그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 남자 혼자는 여자들 사이를 못 지나가지만 여자는 혼자서도 남자들 사이를 지나갈 수 있다고 한다. 나도 여자임이 맞는지 뻔뻔한 얼굴로 그 시선들을 즐기며 지나갔다. 정말 내가 그럴 수 있음에 나도 놀랬다. 이것이 나의 본연의 모습이란 말인가...
복도를 지나 강의실에 들어오면 또 다른 관문이 있었다. 바로 남학생들의 질문 공세.
“저기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몇 년생이십니까?”여기서 조금 더 발전하면
“회사 다니십니까?” “왜 전자공학과를 왔습니까?”그것도 돌아가면서 물어보니 틈만 나면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느라 힘들었다.
참 나머지 여학생 셋은 어찌 되었는지 수업의 절반은 안 들어왔다. 아마도 모범생은 아닌 듯싶다. 내가 말로만 듣던 홍일점이 되는 날이 많았다. 그러니 자연히 모든 관심이 나에게 쏠릴 수밖에. 그리고 웃기는 상황 하나는 강의실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으면 딱 내 앞 뒤 양옆엔 빈자리라는 상황이다. 아예 책상을 들고 피하는 경우도 있으니 마치 내 주변엔 무슨 보호막이라도 설치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뢰였나?
남학생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첫째, 수업을 잘 안 들어오는 여학생들 덕분에 내가 홍일점이라는 점.
둘째, 사투리를 쓰지 않고 혼자만 표준어로 말한다는 점. 경상도 사나이에겐 표준어로 말하는 여자가 무척이나 예뻐 보인다나 뭐래나...
또 회사를 다니면서도 장학생이고 공부를 무척 열심히 한다는 점, 나이가 제일 어리다는 점,...등등이다.
어찌 보면 특별한 것도 아닌데 전자공학과라는 울타리가 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며칠 지나자 이런저런 질문들을 하고는 하나 둘씩 나에게
“우리 또래인데 말 놓고 지내는 게 어때여?”하며 다가왔다. 그러나 아지트의 규칙을 최대한 지킬 수 있는 데까지는 지켜야 하겠기에 단호히 정중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높임말이 편하니까 아저씨는 편한대로 하세요.”
이 대답에 여기저기서 난리다. 아저씨라니... 또래인데. 내가 생각해도 조금은 미안했지만 뭐 특별한 호칭이 없었기에 그냥 그렇게 말해 버린 건데 아마도 큰 충격이었나 보다. 이제 고등학교 갓 졸업한 또래에게 아저씨라니...
대화까지는 못 해도 질문공세에 대한 대답으로 만족해하며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 달동안 연구 대상인 나에 대해 캐고 다니는 이가 여럿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회사 버스에서 내리는 곳을 감시했다가 어느 회사인지 알아내고 학과 사무실까지 동원하여 나의 신상명세서 정도는 충분히 뽑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행복한 착각에 빠져있는 어느 날 나에게 한 신사가 다가왔다.
“와 공부 열심히 하시네요? 회사 다니며 공부하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아. 네.” ‘어라? 어디서 봤던 얼굴인데...... 언제 봤더라?’
내 앞자리에 앉는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힐끗거렸다.
그 때 뒤통수가 따끔거렸는지 돌아보고는 “B장학생이시죠?”하는게 아닌가...
“아니. 그럼...”
그렇다 내 바로 위였던 1등 ‘A장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입학 면접시 같이 들어갔었던 세 명중의 한 명. 나보다 수능 점수가 2점 높았던 그 아저씨... 순간 너무 반가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저 혹시 기억나세요? 면접 때 같이 들어갔었는데... ”
“어~ 그러세여? 기억이... 암튼 앞으로 잘 지내요~.”하며 눈을 찡긋하는게 아닌가...
가슴이 콩닥콩닥... 꼭 들릴 것만 같았다. 한 달 동안 처음으로 대화를 하는 나에게 모든 시선이 몰리고... 그 아저씨에게도 관심 집중되고... 지금 막 커플이 된 것 같은 분위기. 얼굴은 홍당무처럼 달아올라 귀까지 벌게졌다. 수업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공부하는 척 아무 일 없었던 척하며 책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마도 쉬는 시간되면 그 신사 곁으로 몰려들 것이다.
참 이상하다. 수업 끝나고 아지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도 콩닥거리는 가슴이 멈추질 않는다. 머릿속은 그 신사의 찡긋거리는 눈이 계속 맴돌고 ... 보통 때 같았음 하루 종일 고단한 몸으로 버스 안에서 곯아 떨어져야 하는데 잠이 오질 않는다. 오늘따라 광안리의 해안 도로가 너무나도 아름답다. 상점들의 불빛으로 환한 조명 아래 많은 커플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 뭔가 속삭이는 모습이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나도 내려서 바다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좀 전의 상황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허락되질 않았다.
‘아! 아지트의 규칙!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양심에 찔렸다. 생각조차 해선 안 되는 이성과 대화도 나누고 내내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다니...
‘낼부턴 좀 더 경계해야겠다. 새벽예배 때 회계해야지.’
‘죄송합니다. 나의 죄를 사해주소서. 다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