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식을 하루 앞두고 들뜬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는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자꾸만 실룩거려지기도 하고 실실거리며 웃기도 하고. 이런 게 작은 행복이라는 건가?
오늘의 이런 행복을 맛보기 위해 내가 그토록 참아왔던가...순간 나의 수난시대 고등학교 3년 생활이 영화필름처럼 좌르륵 돌아갔다.
난 좀 특이한 고등학교 아니 특이한 생활, 공간에서 살고 있다. 중3 때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실업계를 택했다. 성적은 우수한 인문 고에 갈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학교 담임선생님도 어이없어 하셨고 부모님도 나를 설득시키려 무척이나 애쓰셨지만 나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난 남다른 삶을 만들고 싶었고, 나 스스로에게 도전하여 한계에 다다를 때의 짜릿함을 맛보고 싶었다. 너무 어른스러웠나? 그래서 택한 길이 스스로의 힘으로 공부하고 생활하며 하루 24시간을 쪼개어 정말 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아보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그런 곳을 찾을 수 있었는데 지금의 이 곳(이제 아지트라 부르겠다). 아지트의 규칙은 <B사감과 러브레터>를 떠오르게 했고 주변의 풍수지리조차 명당자리라고 할 만큼 산으로 둘러싸여 물 맑고 공기 맑고 저 너머엔 바다도 어렴풋이 보이고 그래서 밖의 세상과는 단절된 듯 보이는 이 곳 아지트. 이성 문제는 있어서도 안 되고 독실한 신앙생활과 그 외에 꼭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 엄청났다. 남들이 보기엔 스님이 세상 인연을 다 끊고 절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난 이 곳을 택했다.
고등학교 3년.
정말 어린나이에 인생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소중한 시절이다. 하루 일과를 간단히 정리해 보면 새벽 5시에 일어나 새벽 예배를 드리고 8시에 생산 공장에 출근하여 하루 종일 왕왕거리며 돌아가는 기계들과 싸우고, 퇴근 후 저녁먹고 학교 갔다가 밤 11시나 되어서야 기숙사로 돌아왔다. 세면하고 숙제하고 또 공부에 욕심이 많았기에 졸린 눈을 치켜뜨며 쌍심지를 켜고 공부 좀 하면 새벽 2시. 결국 하루에 3시간을 자는 셈이었다. 정말 악착같이 열심히 살았다. 다른 고등학생처럼 사춘기 방황이나 옆을 돌아볼 시간조차 없었다. 난 회사생활, 학교생활 그리고 종교생활까지 병행하여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밥 먹는데도 3분내지 5분, 화장실도 후다닥. 그리고 기숙사, 교회, 회사, 학교를 열심히 뛰어다녔다. 내 자신에게 나태해질 틈을 주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악바리같이 살았는데 남들 눈에도 보였는지 별명조차 악바리였다. 독한 악바리! 고3때는 학생회장까지 하며 온갖 학교 행사와 회사 행사에도 앞장서고 정말이지 형사 25시가 아닌 예진 25시였다. 후후.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가 내 전성기였던거 같다.
고3 막바지.
다행히 수능 시험을 치르고 나서 슬럼프가 잠깐 왔었다. 그 동안 쉼 없이 달려와서인지 너무 힘들고 지쳐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마지막 행사 졸업발표회를 준비해야 했기에 숨돌릴 틈이 없었다. 이 곳에선 학교 행사가 단순히 학생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회사도 종교도 연관이 되어 큰 행사가 되어버리기 일쑤다. 졸업발표회야 말로 정말 큰 행사다. 회사 사장님 이하 임원 분들까지 참석하실 정도로 ... 학생회장인 나로서는 정말이지 커다란 산을 하나 넘어야 되는 입장이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떡 하나 후딱 던져주고 대충 지나가고 싶지만 줄 떡이 있어야 말이지....
몇 달동안 아예 학교에서 밤새워 연습하고 후배들까지 챙기며 준비를 하였다. 노력의 결실이었을까? 학생회장으로서 사회를 맡은 나는 아지트의 윗분들로부터 칭찬과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나중에 그 관심이 나에게 커다란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이젠 모든걸 훌훌 털어버릴 졸업식. 회사에서 성대히 파티를 열어준다. 5단 케이크과 호텔요리장들의 출장뷔페로. 그 파티에서 난 졸업생 대표로 위의 큰 어르신들과 함께 케이크의 촛불을 끄고 절단할 수 있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부모님과 다른 학부모님들, 회사원들,기타 많은 손님들 앞에 대표로 서 있는 내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결코 평탄하지 않았던 내 고등학생 시절. 정말이지 나에겐 엄청나게 화려했던 수난시대였다.
후~
3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단편영화가 될 줄이야. 한 마디로 열심히 바쁘게 살았다는 내용뿐이지만 대박감이다. 내 스스로에게 99점이라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나의 단편영화 필름을 돌리며 큭큭거리는 내 웃음소리에, 방민(같은 방 사람)들이 뭐가 그리 좋냐며 빨리 자라고 장난끼있는 꾸중을 하는 통에 할 수 없이 잠을 청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세 마리,...
드디어 입학식!
예비소집일 때와 같은 상황이 연출됐다. 우글거리는 늑대들을 헤치고 전자공학과 줄을 찾아 서는데 남자들 사이에 있어서인지 내가 너무 작아보였나 보다. 학과 선배가 나를 보고는 이끌고 제일 앞으로 가는데... 헉! 이럴수가...가는 동안 여학생이 하나, 둘, 셋! 밖에 없다. 나까지 넷! 3년동안 비슷한 나이의 남자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이젠 여자가 손에 꼽을 정도라니...이성 문제를 엄격히 다루는 아지트에서 길들여지다 보니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당혹스러웠다. 또 한편으론 좋기도 했다. 이런 생각은 아지트 규칙 위반인데 그래도 어쩌랴 나도 인간인데...이런 횡재가...이럴때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었다고 하나? 내가 원하는 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더구나 멋진 남학생들까지...라이벌도 얼마되지 않고...머릿속에선 순식간에 계산이 되어 정답이 나왔다. 하하 아지트의 도를 터득하려면 아직 멀었나보다. 하산하기 전에 아지트퇴출 당하는건 아닌지...'그럴 순 없지. 내가 계획한 것이 있는데 아직은 퇴출당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에 늑대들에 대한 경계심을 추켜 세웠다. 그래도 머릿속에선 낭만적인 순정 만화 한 편이 내가 주인공이 되어 그려지고 있었다. 음 너무 낭만적이야~
머릿속의 순정만화에 가슴 설레는 동안 학과 건물에 도착했다. 참새 짹짹, 오리 꽥꽥도 아닌데 줄서서 선배를 따라 강의실까지 들어가는 동안 앞 뒤 옆 남학생들이 흘끔흘끔 쳐다보고는 자기들끼리 킥킥거렸다. 우미 순정만화 깨지네. 순간 호박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다른 여학생 셋은 나름대로 예쁘게 화장도 하고 옷도 가방도 그럴싸하게 대학생같이 꾸몄다. 그에 반해 난 머슴애 같은 커트 머리에 화장끼하나 없는 맨얼굴, 옷 따로 가방 따로, 신발은 첨 신어보는 굽 있는 구두라 걷기도 불편하고(더구나 우리 학과는 바다가 보이는 높은 언덕에 동떨어져 있었음),...내가 넘 초라하게 느껴졌다. '우이씨 이 자식들 나중에도 웃음이 나오나 보자. 내가 누군지나 알고 감히...' 이렇게 나 스스로를 위로하며 눈 질끈 감고 남학생들 사이를 지나 강의실로 들어갔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 후 서로 인사들을 나누는데 난 그냥 부랴부랴 챙겨서 강의실에서 맨 먼저 빠져나왔다. 그리곤 곧장 중앙 도서관에 친구 만나러 가는데...누가 나를 불러 잡아 세우는 게 아닌가.
"저기요! 저기요! 잠깐만요!"
'혹시 나를? 설마...날 왜 부르겠어.'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