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지 이년이 다 되어 갈 무렵
어린딸을 업은 영은은 집 골목에 붉은 고추를 널고 있었다.
그때 앞으로 서울 번호의 차가 한대가 섰고 운전석에서는 진경이 내렸고, 길가에 앉은 영은을 한눈에 알아 보았다.
얼마후 마당의 대청마루에 앉은 두사람
-어떻게 여길........
추억이 있는 오랜 친구도 아니고, 그다지 반가운 얼굴도 아닌데.......
영은은 의외였다. 믿을수가 없었다. 몇년의 세월이 지난후 자신앞에 서 있는 진경을
진경을 바라보는 마음 깊은 곳에서 진우가 생각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영은의 마음도 편안해 져 있었다. 세월탓일까?
-방으로 들어 가자.
-아니 여기가 더 좋은데........나무 있어서 시원하네 공기도 참 좋고
그러면서 감나무 아래의 대청마루로 앉는 진경
-이거 마시렴
얼마후, 영은은 미숫가루를 건넸다
-나 사실 여기 오기 쉽지 않았어. 널 만나러 오는게......더구나 오빠 소식을 전하러 오는게........
오빠의 소식이란 말을 듣자 영은은 잠시 멈췼했다. 하지만 떨리는 심정으로 담담히 얘기했다.
-얘기해
-사실 이 얘기를 해야 하는게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해야 할것 같아서.......
-얘기해. 난 괜찮으니까,.....
진경은 미숫가루를 한 모금 마셨다
-사실, 진우오빠 지금 많이 아파
'진우씨가 아프다고? 지금쯤 결혼하여 부인도 있을테고 어쩌면 아이도 있을 텐데........
그 얘기를 이제와서 자신한테 하는 이유를 영은은 알수가 없었다. 그러나 진경의 얘기를 다 듣고서야 영은은 그 이유를 알수 있었다
-그게 모두 거짓말이야. 오빠는 널 버린것처럼 위장해서 떠나거야. 우리집에서 널 반대하려는 순간 얼마 되어 오빠가 그러더라.
스스로 너를 그만 만나겠다고.......그때까지 우린 오빠의 병을 알지 못했어. 그리고 얼마후에야 오빠가 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지. 오빠의 부탁으로 절대 얘기하지 않기로 했지만,
.......
아마 수술 들어가기 전날 이었을꺼야. 오빠는 머리맡에 뭔가를 숨기고 자주 본다는걸, 수술실에 들어가서야 그것이 너의 사진이란걸 알게 되었어. 아마 병원에 있는 동안 내내 그 사진을 몰래 보았던거 같아. 그걸 보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널 얼마나 그리워하고 보고파하는지.......그런 오빠를 보면서 너한테 몰래 얘기하려고 찾아 갔었어. 하지만, 이미 늦었더라 넌 결혼한다고 그 옷가게를 떠났을 때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제와서 날 찾아온거........이미 난 결혼을 했고.....
-미안해. 이기적이지.
-.........
-사실, 오빠 널 만나고 싶어해. 죽기전에 널 한번이라도..........나도 결혼해서 아이가 있으니까 너의 심정 알아. 어떻게 바라는건 없어. 한번만 만나 주는 것도 안되겠니?
-.........생각해 볼께?
그 사실을 전하고 얼마후 진경은 차에 올라 탔다.
영은은 그런 진경을 바라보다가 차창으로 고개를 들이대며 얘기했다.
-꼭 내가 간다고 기다리라고 해줘. 꼭 간다고.....
진경의 차가 서서히 골목을 빠져 나가자, 영은은 그자리에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떻게 이런일.....그래서.......너무 아파서 날 떠났다고.......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얘기를 해 주면 어쩌자는 거야. 난 그것도 모르고, 좋은 추억은 지워 버릴려고만 애써고, 나쁜 추억만 기억해서 미워하면서 살았는데.......그 시간들, 어떡하라고....
얼마후, 대청마루에 앉은 영은은 진경이 두고 간 큼직한 박스를 풀며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동화책이야. 너의 아이가 커면 읽어 주렴. 사실 일부러 산건 아니고 우리 남편이 서점을 운영하거든. 그리고 혹시 오게 된다면 이박스에 적힌 주소로 찾아오렴'
영은은 꿈을 꾸는 듯 했다.
뜻밖의 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건지........그리고 그 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자신이 너무 멀리 와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