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475

새로운 인연


BY 엄지공주 2003-08-01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작은 가방 하나, 힘없이 든 영은이 골목길로 들어 섰다.

이미 몸은 새벽부터 맞은 비로 온통 젖어 있었다.


<금실 양품점>이라는 간판앞에 멈춰 선 영은

 

유리문 안으로 디스플레이 해 놓은 분홍빛깔의 원피스가 영은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정말 이쁘다

 

영은은 비를 맞아 온 몸이 떨리면서도 그 옷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못한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온몸에 힘이 빠지고 더이상 걸음을 옮길수 없어 그 처마 밑으로 쪼그리고 앉았다


어느새 잠이 든 영은

영은은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영은은 한참후에야 눈을 떴다.

 

낯선불빛과 천장, 주위에 쌓여 있는 낯선 옷가지들.

온통 낯설었지만, 이불의 포근함 때문인지 너무 따뜻하고 편해서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드냐?


열려진 문으로 낯선 주인여자가 하얀 약 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양잠점 이씨였다.


-네. 근데 여긴........


영은은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지 말어. 기억 안 나냐. 새벽에 우리가게 앞에 쓰러져 있었잖니?


-고마워요.


영은은 그제서야, 이층 양옥집을 나와 헤매이던 자신을 기억했다.


-고맙긴..........난 송장 치르는지 알고 얼마나 놀랬는지......

그나마 다행이야. 몸살이라  푹 쉬면 괜찮아 질꺼야. 근데 어쩌자구 이 새벽부터 비 맞고 쓰러진거냐. 집 나온거지.


-.........


-몸 좀 나으면 집으로 들어 가거라. 뭐니 해도 집이 최고인거야


영은은 이대로 집에 갈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도둑 누명을 쓴채 고향으로 가서 부모님에게 어떻게 얼굴을 들지.......

또 동네사람들의 수군거림들.


-저....... 집 없어요


영은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 버렸다.


-집이 없다구.......그럼 고아란 말이니?


영은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어디서 살았는데........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 했어요. 그러다가 그집을 나온 거구요

 

-아니? 왜........ 하긴 남의집 일한다는게 그렇게 쉽진 않으니까,

그러면 갈때가  정해질때까지 여기서 잠깐 있거라.

 

-그래도 돼요?

 

-그렇게 하거라.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집없는 아픈애를 쫓아낼수는 없잖니?


영은은 그때까지 그곳이 잠시 스쳐 가는 기차역 같은 곳인줄 알았다,

하지만 오랜시간 머무는 새로운 인연의 시작점이 될줄은 그때까지 몰랐다.


-일어나서 밥 먹을 수는 있겠지. 저기 상은 차려 놨으니까, 밥만 퍼서 먹으면 된다. 그리구 이약도 먹구.

 난 서울 가서 물건하고 천 좀 떼러 갔다 와야 하거든......너때문에 좀 늦긴 늦었다. 대신 너가 집 좀 잘 보거라


양장점 이씨는 서둘러 작은 손가방을 챙기고, 옷을 걸치고 있었다.


-죄송해요. 그리고 고맙구요

 

-아니다. 쉬거라. 오후엔 비가 그친다고 했는데...

 

-문열쇠 여기 두고 갈테니까, 혹시 밖에 갈일 있거든 쓰고, 내 올때까진 가게문 열지 말고...

 

-네.......그럴께요


새벽부터 내린 비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정오가 지나서 따가운 여름 햇빛이 세상을 내 비추고 있었다. 


영은은 가게 문을 열고, 청소를 하며 이 양잠점이씨를 생각하고 있었다.


'참 좋으신 분 같다.'

 

처음 영은이 이층집의 주인여자 아주머니를 보았을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사람에게도 이렇듯 느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영은은 방과 부엌을 치우고, 방과 이어진 가게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부분 구석에는 낡은 재봉틀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담하지만 꽉 차 보이는 가게안에는 옷갖 옷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고 몇 개의 옷들은 벽에 걸려 있었다.


'온통 옷 세상이네. 이쁘옷 참 많다'


양장점 이씨는 큰 보따리를 든채,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휴 무거워

 

그의 얼굴에는 온갖 땀으로 범벅이 되 있었다.

 

가게 앞에 다다랐을때,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열려진 문안으로 들려오는 흥얼거리는 영은의 노랫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꽃 아카시아꽃..........


가게안의 영은은 걸레로 여기저기를 닦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밝고 언제 아팠냐는 듯  활기차 보였다.


영은은 투명한 창문 너머로 그런 이씨를 보았다.

걸레질을 멈추고 급히 밖으로 뛰어 나왔다.


-어 아주머니 오셨네요. 왜 안 들어오시고.........

 

-아니 넌 괜찮냐? 아픈애가 뭘 하고 있는 거냐?

 

-네. .......그냥 청소 좀 하고 있었어요.

 

-이게 전부 옷이에요. 저 주세요.

 

그러면서 꽤 두툼한 큰 보따리를 뺏어 들어 안으로 들어 갔다.

 

-아니 조끄마한 애가 무슨 힘이 그렇게 센지.......

 

이씨는 가게 안 의자에 앉았다.


영은은 보따리를 들어 한 구석에다 놓았다.

양장점 이씨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고는 급히 부엌으로 갔다.


부엌에서 나온 영은의 한손에는 하얀그릇 차가운 냉수가 담겨 있었다.

 

-이거 드세요. 더우신데.......


양장점 이씨는 그런 영은을 바라보며,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너 몇 살이냐?

 

-열여섯살요.

 

-열 여섯 살..........보기보다 많이 먹었네.

 

-네..........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작죠.

 

-사람이야 큰사람도 있는거고 작은 사람도 있는 거지. 그것보다 너 갈때는 있냐 ?

 

-............

 

-그럼 너 여기서 일 해 볼테야. 물론 먹여주고 월급도 좀 주마

 

-정말요?........그럼 전 고맙지만, 아무것도 할줄 아는 것이 없는 걸요

 

-일은 차차 배우면 되는 거니까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전에 하던 애가 사실 얼마전에 그만 뒀거든. 그래서 사람이 필요하긴 했었는데....... 아마도 인연인거 같다.

 

-저.....정말이에요? 고맙습니다


영은은 놀라움과 고마움에  어쩔줄 몰라 하며 꾸벅 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