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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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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생


BY 안젤리나 쫄티 2003-07-14

 

학교가 끝나고 난 도장을 향했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 후 줄넘기와 스윙연습을 했다.

샌드백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체육관에서의 모습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야, 형준아.   오늘은 니가 뽑혔다.

얼른 글러브 끼고 올라와.   이 누나가 살살 다뤄줄테니까.“


난 사각 링에 올라서서 열심히 잽을 날리던 친구 형준이를 불렀다.


“에이, 싫어.  너 스파링상대 해주면 온몸이 아작 난다구.  나 말고

딴 애 시켜라, 응?“


“안돼,  니가 실력이 젤 낫잖아.  몸이 근질거려서 도저히

못 참겠어.  한번만 맞춰주라.  담에 내가 대줄테니까.   에이,

그래도 너밖에 없잖냐.  오늘은 진짜로 살살칠께.  약속.”


“너 정말 살살 할꺼야?”

“그래,  진짜 진짜로 살살할께, 형준아잉, 한번만~”

나의 되지 않는 애교에 형준인 마지못해 올라왔다.


“으휴...... 널 누가 말리냐.  근데 제발 좀 살살해.

저번에도 니 스파링 파트너 했다가 온 몸을 파스로 도배했단 말야.”


“알았어, 알았어.  이따 끝나고 내가 맛있는거 쏠께.  파스도 한박스

사줄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  알겠지?”


“뭐?  야, 파스는 안 사줘도 되니까, 맛있는거 사준다는 말만 잊지마라.”

형준인 파란색 글러브를 끼고 헤드기어를 쓰면서 링의 중앙에 섰다.


“자, 시작한다.”


우린 서로 두 주먹을 앞으로 내밀고 가볍게 부딪히며 인사 한 후 경기를 시작했다.

나와 같은 시기에 운동을 시작한 형준이는 실력도 만만치 않아 좀처럼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양 발을 서로 번갈아가며 가볍게 뛰면서 내 빈틈을 찾고 있었다.

우린 서로 가볍게 잽을 날리며 상대를 한참 탐색한 후 스트레이트를 한방씩

주고받았다.


잠깐 얼음공주의 얼굴이 떠올라 정신을 판 사이 형준이가 내 오른쪽 옆구리를

파고들어 왔다.


난 왼쪽 발에 무게중심을 실고 무릎을 굽히면서 가슴과 어깨를 회전한 후

살짝 비켜서 형준이의 왼쪽 옆구리 빈곳을 역습했다.


정통으로 맞은 형준인 배를 문지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여튼, 네 반사신경은 알아줘야겠다.”

근데, 너 무슨 고민있냐?  경기중에 잡생각을 다 하고.”


“너 뭐 맛있는거 사줄까, 메뉴 고르고 있었어.”



땀을 수없이 흘리며 몸에 남아있던 마지막 에너지까지 쏟아 붓고 우린

사이좋게 도장을 나왔다.


푸짐한 떡볶기에 넋이 나간 듯 환하게 웃는 형준이의 눈가가 퍼렇게 멍이

들었다.

난 미안한 마음에 용돈을 다 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올려다 본 밤하늘엔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얼음공주.....’


입안이 씁쓸하다.



담날 학교에서 마주친 얼음공주는 여전히 쌀쌀맞고 무표정에 무관심......

더욱 견고히 얼음장막을 쳐버린 체 범생이 얼굴로 책만 파고 있었다.


아, 담배생각 간절하구만......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운동장 옆 우리의 아지트로 자리를 옮겼다.


커다란 느티나무 등걸에 몸을 기대고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향해 담배연기를

품어대고 있었다.


조금 있으려니 희정이,선아,봄이랑 새로 합류한 미정이란 애까지 몰려왔다.


“재영아, 점심 먹었어?”

“아니, 생각 없어.”


“너 요즘 무슨 고민 있어?”

“아니, 다이어트 중이야.”

“얼굴빛이 안 좋은데?  너 혹시 사랑에 빠졌냐?”


봄이의 장난기어린 물음에 난 피식 웃고 말았다.


아이들은 잔디밭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재밌는 수다에 빠져들었다.


“캡 짱, 담뱃불 좀 빌려줘.”


새로 전학 온 미정이가 담배를 내밀며 내게 다가왔다.

난 미정이를 노려본 후 손짓으로 가까이 불렀다.


아이들은 수다를 멈추고 나와 미정일 바라보았다.


미정이가 담배를 입에 문체 내게 다가오자 난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여

미정이에게 건네주었다.


“캡 짱, 고마워.  근데 가까이서 보니 정말 예쁘네.  소문이 사실이었어.

나 캡 짱 볼려고 일부러 전학왔거든.”


그러면서 미정인 순식간에 내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


바라보던 아이들은 이상한 신음소릴 내면서 침을 삼키고.

잠시 몇 초가 흐른 후 기습 키스를 받은 난 검지손가락을 세워 미정일 불렀다.


싱글거리며 미정이가 가까이 앉자 난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미정이의 귓가에 길게 내뿜었다.


“손미정,  내 이름은 장.재.영 이야, 내 앞에서 절대 캡짱이라 부르지 마라.

듣기 싫으니까.   그리고 아까같은 행동 한번만 더하면 갈아버린다.”


귓가에 낮게 속삭이자 미정인 흠칫 떨더니 얼굴이 벌개진 체 벌떡 일어나 뛰어가버렸다.


난 아무 일 없단 듯이 다시 나무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아이들도 아까처럼 또다시 수다에 빠져들고.....


“어...어....얼음공주......”

갑자기 선아가 뒤를 보며 소리쳤다.


눈을 감고 있던 난 얼음공주란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얼음공주는 장미 울타리너머 정면에서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서있는 것이다.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온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언제부터 서 있었지?   젠장, 내가 왜 또 쪼는 거야.....’

 

 

“야, 얼음공주.......”

희정이가 부르며 엉거주춤 일어나자 갑자기 민지는 뒤를 돌아 뛰어가 버리는 것이다.


“아, 씨팔,  첩자한테 드럽게 걸려버렸네.   담탱이한테 뒤질 각오 해야겠다.”

선아가 투덜대자 아이들도 한마디씩 욕을 해댔다.


“나 이번에 걸리면 정학시킨댔는데.....집에서 쫒겨난단 말야.  저년 분명

담탱이한테 꼰질르겠지?  아, 재섭써.”


난 담뱃불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아무말이 없자 아이들도 입을 다문체 각자 교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