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다음날 담임은 퉁퉁 부은 얼굴로 학교에 나왔다.
아침조회도 생략.
영어시간엔 인사도 안받고 교탁에 머리를 박은 체 아이들을 향해 고개도
들지 않았다.
수업도 앞자리 앉은 아이들이나 겨우 들릴 듯 말 듯 중얼중얼.
피휴...
짜식 또 삐졌네.
왜 맨날 남자새끼가 삐지고 지랄이냐.
아이들은 3년내내 겪어온 담임의 성격에 신물이 날 정도였다.
아니 왜,
실컷 때려놓고 맞은 사람이 풀어주길 바라냐고.
뒷자리의 아이들은 같잖다는 듯 비웃으며 귀찮고 짜증난 표정들이 역역하다.
저게 나름대로 사과하는 방법인지 아님 저 방법이 교육효과가 있다고 믿는 건지.....
에휴.... 잠이나 자자.
점심시간.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운동장 뒤편의 풀밭에 앉았다.
거기는 햇빛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으로 우리들이 즐겨 후식을 먹는 명당자리.
“아유, 담탱이 꼬라지 봤냐? 그 인간 또 시작이다.”
“어떻게 나이한살 더 처먹어도 고쳐지지 않냐.”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그 병이 고쳐지겠어?”
“에휴.... 한 며칠 쥐죽은 듯 보내야지 뭐.
이때 또 걸리면 완전 개죽음이다.“
난 잔디밭에 팔배게를 하고 드러누웠다.
흰구름이 뭉개뭉개 떠가는 곳으로 회색 담배연기도 길게 따라간다.
“재영아, 담임이 너한테 사과했어?”
“아니.....”
“야, 바랠걸 바래라. 그 쫌팽이가 총 맞았냐.”
“그래도 이번엔 좀 너무 심했자나. 나 재영이 그러다 죽는줄 알았다니까.
지도 인간이면 사과해야 되는거 아냐?”
희정이랑 친구들 몇이 떠들거나 말거나 난 담배연기만 내뱉고 있었다.
햐. 오늘 날씨도 참 좋구나.......
“야 야... 걔네들 또 그런다더라.”
“누구?”
“그 있자나. 레즈클럽 애들 말이야.”
“걔들이 왜?”
“어제 경아가 복도에서 봤데. 키스를 아주 끝내주게 하더래.”
“복도에서?”
“그래, 저번엔 화장실에서 하더만 이젠 아예 대놓고 막 한덴다.”
“미쳤군. 미쳤어.”
“이번엔 1학년짜리가 찍혀서 넘어갔데. 걔 미모도 장난 아니거든.”
“재영아, 너 레즈클럽 들어봤어?”
희정이가 슬핏 잠든 내 팔을 잡아 흔든다.
“뭐?”
“레즈클럽 말이야.” “아니, 그게 뭔데?”
“너 아직 모르니? 하여간....... 레즈비언들 모임이야. 거기 회장이
백장미라고 왜 우리학교 한 미모 하는 애 있잖아. 걔가 만든 건데 거기 회원들은 자기들끼리 뽑는데.
웬만한 얘들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미모가 되는 애들만 들어가자나."
참 내. 별 얘기도 아니구만.
난 다시 식후의 단잠에 빠져들었다.
“야, 근데 걔들이 어떻게 뽑는다는 거야?”
호기심많은 선아가 묻자 희정이는 눈을 빛내며 얘기에 열을 올렸다.
“지들끼리 맘에 드는 얘들을 선별해서 찍은 다음 대시를 하는 거지.
그 대시 방법이 뭔줄 알어?“
“몰라. 어떤 방법인데?”
“넌 아직도 모르니? 우리학교 모르는 애들 없어. 원 소식이 깡통이네.”
답답한지 옆에 있던 봄이가 거든다.
“야, 내가 갈켜줄께. 봄이 넌 가만 있어봐.” 나서기 좋아하는 희정이가 다시 낚아채고.
“지들이 찍은 애들은 그 애 몰래 다가가서 키스를 한다는 거야.”
“웩~ 정말?”
“그래, 정말이야. 걔들 지금 회원이 7명이자나. 걔네들 전부가 그렇게 한다는 거야.
첨엔 회장이 먼저하고 나머지가 돌아가면서 쪽쪽쪽 하면 정신 못차리게 돼 있지.”
“어머, 왠일이니? 설마, 그정도에 넘어가니?”
“야, 넌 만약에 백장미가 너한테 키스하면 아무렇지 않을 자신있어?”
“ ?? ”
“백장미뿐이면 다행이게? 거기 신보람도 있어. 같은 여자가 봐도
보람인 끝내주잖아. 나 저번에 신보람 앞에서 직접 봤는데 진짜 넋이 나가더라.”
“아우, 그럼 난 입조심 해야겠네. 내 소중한 첫키스를 여자한테 뺏길순 없지.”
“야야, 김선아! 절대 걱정마라. 니 소중한 첫키스 뺏을 비위좋은 애들 없다. 나 정도라면 모를까. 킥킥킥”
“야, 근데 너희들 새로운 소식 들었어?”
봄이가 입을 열자 모두들 봄이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번에 레즈클럽에서 찍은 애가 누군지 알아?”
“누군데? 빨리 말해봐.”
“놀라지 마. 우리반 얼음공주야.”
“뭐? 민지 말야?”
“그래, 사실 저저번에 한번 접근을 했었는데 민지가 안 넘어왔데.
레즈역사상 첨이래나. 그래서 이번에 다시 재도전. 회장이 얼음공주한테
엄청 눈독들인데. 이번엔 좀더 센 방법으로 한다던데?”
얼음공주 얘기가 나오자 난 가슴이 뜨끔했다.
그 애의 잠든 모습이 떠오르더니 이상하게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에이, 시팔.
“야, 수다 다 떨었으면 그만 교실에 들어가자. 학주 순찰시간이잖아.”
내 말에 아이들은 부스스 일어나 교복 치마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었다.
희정이가 내민 껌을 씹으며 우린 교실로 향했다.
교실로 들어선 내 눈에 얼음공주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생리대 잘 받았나? 내가 넣어논 걸 알았겠지?’
그때 뒤를 돌아보던 얼음공주와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서늘한 얼음공주의 눈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자 난 그만 숨이 턱 막혀버렸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져 당황했는데 얼음공주는 냉정하고 싸늘한 눈초리로
한동안 날 노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다.
젠장, 뭐냐고. 왜 내가 얼굴이 빨개지고 난리야. 그리고 쟤는 왜 자꾸 날 째려 보는거야. 짜증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