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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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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보니


BY 안젤리나 쫄티 2003-07-09

 

눈을 떠보니 사방이 캄캄하다.


윽....

온 몸이 쑤셔댄다.

양호샘이 준 진통제를 먹었는데도 골이 빠개질 듯 아팠다.


젠장.

한발 내딛을 때마다 골이 울린다.

씨팔.

담탱이 새낀 여자한테 단체로 직사게 터져봐야돼.

어떻게 여자를 이렇게 개패듯 패냐.

내가 틀린말 했어?

지 키가 작으니까 작다고 했지.


재영이는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올리고

아직까지 욱신거리는 배를 움켜잡으며 양호실을 나왔다.


캄캄한 복도엔 사람 그림자하나 없고 희미한 달빛만이

조금씩 비춰지고 있었다.


책가방을 가지러 교실에 들어선 재영.

엉?

불이 켜져 있네?

뒷문을 열었더니 우리반 부반장인 최민지가 돌아본다.


“너 아직도 집에 안가고 뭐하냐?”

“장재영, 몸은 괜찮아?”

“뭐, 그럭저럭.  혹시 나 기다렸냐?”

“아니,  난 매일 남아서 숙제하고 가거든.”


내 자리로 가서 책가방을 집어든다.

최민지는 고개를 숙이고 숙제하는 중.


남 일엔 전혀 관심없는 범생이 최민지는 미친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차가운 미모의 소유자다.


한때엔 미친개의 첩자라고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았었는데

워낙 무반응에 말 한마디 없는 그 애 태도를 당할 수가 없었다.

또 얼음공주 최민지가 그럴만한 애가 아니라는 걸

반 애들은 다 알고 있었다.


훗...왠일로 얼음공주가 말이 많네?


“야, 장재영”

왼쪽 어깨에 가방을 둘러멘 체 교실 문을 나서는데

최민지가 불렀다.

“왜?”

“이거 빌려 줄게. 가져가.”

민지가 내민 건 분홍색 생리대.


“뭐야,  나 아직 멀었어.”

“이거 안 필요해?”

민지는 내 종아리를 가리켰다.


그때 내 종아리에서 무언가 뜨듯한게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 보았더니

뜨악..

빨간 피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윽.  담탱이 새끼.”

민지의 손에 들린 생리대를 뺏다시피 가지고

화장실로 향했다.


젠장,

골병들기 전에 어서 졸업을 해야지.



담날은 조금 일찍 나섰더니 가까스로 지각은 면했다.

교실에 들어가 앉았더니 애들 몇 명이 우르르 몰려든다.

“야, 재영아, 괜찮아?”

“어제 볼만했어. 담탱이가 드디어 완전히 미쳐버렸더군.”

“미친개가 완전히 개거품 물더라.”


애들은 내 관자놀이에 붙은 반창고를 서로 만져보며 떠들어댔다.

“아, 난 멀쩡해. 귀찮다. 저리들 가라.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니 졸려 죽겠어.“

책상에 드러누워 버렸다.


짝꿍 희정이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더니

교탁앞에 반장이 나와 섰다.


“오늘 아침조회는 없어.  담임선생님이 몸이 아프셔서

못 나오셨거든.   조용히 하고 1교시 준비해라.”


젠장,

뒤지게 맞은 년은 나왔는데 뒤지게 때린 놈이 뭐가 아프다고 안나와?


수업 중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더니 문제를 풀고 자리로 돌아가던 얼음공주

최민지가 나를 가만히 노려보더니 몸을 돌려 자리에 앉는 것이다.

뭐....뭐야.  왜 노려보는 거야?

흠.... 어제 빌려준 생리대 때문인가?


분홍핀을 꽂은 민지의 뒷머리가 오늘따라 무지 예뻐보였다.

하긴 우리학교 최고의 퀸카가 예쁜게 당연하지.

그녀의 사물함엔 항상 팬레터가 가득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이웃 남학교의 남학생들 편지가 대부분이었지만

동기생이나 선후배들의 편지도 꽤 되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미모와 무뚝뚝하고 샤프한 인상이

아이들로 하여금 막연한 동경의 대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녀와 난 학기초를 통틀어 어제 처음으로 말을 건넨 사이.


음..... 생리대 때문이라면 어서 갚아줘야 겠군.


휴식종이 울리자마자 짝꿍 희정이에게 생리대를 빌렸다.

생리대를 가지고 얼음공주 자리로 다가갔더니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것이다.

따뜻한 5월의 햇살이 잠든 그녀의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우유처럼 새하얀 피부에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흠..... 얼음공주가 아니라 잠자는 공주구먼.


난 그녀가 깨지않도록 책상 서랍 모서리에 생리대를 살짝

끼워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