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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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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덕만 (상)


BY 마음자리 2003-06-30

 승객들이 다 자리를 잡기 전에 왜관역을 지난 기차는 어느새 낙동철교를 건너고 있었다.
낙동강은 여전히 도도하게 하류를 향해 흐르고 있었고 강 양쪽에는 하얀 모래들이 길게 늘어지며 강을 따라 함께 흘렀다.

 그때 문득 그 글자가 보였다. 누가 썼을까?
 차창너머 보이는 낙동강 모래밭에는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의 큰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토마스덕만>
 어린아이의 장난이었을까? 아니야...그건 아닌 것 같아...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과 그 낙동강을 따라 줄지어 이어진 과수원들 사이, 길게 펼쳐진 모래밭에 크고 선명하게 쓰여진 그 글자에서는 이상하게도 뭔가 사연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글자에 생각의 꼬리가 잡혀있을 즈음, 마침 비어있는 옆자리에 노란 머리의 중년 외국인이 앉았다.

 서울에 있는 무역회사에 면접 시험을 치르러 가는 입장인 나는 어쩌면 영어면접 시험을 미리 연습해 볼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설레었다. 평소 소심해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쉽게 말을 건네지 못했었는데, 오래도록 취직을 기다려온 데다가 입사시험의 가장 주요 채점항목이 영어회화 능력이다 보니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고, 한국에서 외국인과 같은 자리에서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흔치도 않지 않는가.

"Good afternoon~"
"Good afternoon..."

 나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피곤한 듯 내 인사만 받고는 의자를 뒤로 젖히더니 눈을 감아버렸다. 더 이상의 대화를 원치 않는 느낌이 역력해 보이는 동작이었다. 그는 눈이 파랗거나 갈색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붉었다는 것을 빼곤 특이할 곳이 없는 보통의 그저 그런 외국인이었다. 왜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부대에 볼일을 보러 온 외국인인가보다 생각한 나는 금새 실망감을 접어두고 내일 치를 면전시험을 대비한 영어자기소개를 다시 한번 암송하기 시작했다.

 구미역에 다다를 즈음 이상한 느낌이 든 나는 차창 밖을 내다보던 시선을 거두어 그 외국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게 보였고, 그의 어깨가 들먹거리더니, 금새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기차여행에 옆자리에 외국인이 앉는 것도 드문 경우지만 그 외국인이 우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고 황당한 경우가 아닌가...하지만 그런 것들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그는 격한 슬픔에 사로잡힌 듯 보였고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말없이 손수건을 건네는 일이었다.

"May I help you? What''s wrong with you?"
연습하지 않은 영어가 그 순간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미안하네. 그만 갑자기 눈물이 나서..."
 내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던 그의 입에서는 유창한 한국말이 흘러 나왔다.
"어! 한국말을 잘 하시네요."
"나는 한국인이야. 지금은 미국인이지만 오래 전부터 쭉 한국사람이었지."
 그 말을 하고 그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나는 그가 다음 말을 하기까지 기다려야만 할 것 같았다. 이상하게 반말에 대한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혹 아까 낙동강을 지나면서 모래밭에 토마스덕만이라고 쓴 글자를 봤는가?"
"네. 봤습니다. 안 그래도 누가 썼을까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혹시...?"
"그래 내가 썼네...내 이름 토마스덕만."
 그는 긴 숨을 내쉬며 드문드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 어머니는 참 고운 분이셨네...그 어머니가 사랑한 사람은 한국 동란에 참전한 미군 장교였지...누구나 할 것 없이 어려운 시절이었네...다행히 미군부대 군속으로 근무하던 어머니는 전쟁의 와중이었지만 생활의 궁핍은 면할 정도는 되었고, 근무지에서 만났던 미군 장교였던 아버지와 전쟁의 틈바구니에서도 서로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하게 되었다네..."

"그 당시로서는 외국인과의 사랑이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지만 전쟁이란 상황이 아마도 국경을 초월하게 만들었을 테지...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버지는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에서 그만 전사를 하셨다네...태어나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던 나라에서 사랑한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이 태어난 그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이국의 땅에 몸을 묻은 거라네...."

 드문드문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예전에 보았던 영화들을 떠올려 보았다.
전쟁과 평화, 애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모두 전쟁 속에 피어난 애처로운 사랑이야기들이었다. 막연히 그런 사랑이었을까...추측해 볼 따름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나를 임신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 어머니의 이름은 부끄러운 여인의 이름. 화냥년이었다네...내가 태어나자마자 내 노랑머리와 파란 눈은 바로 그 화냥년의 증거가 되었지..."
 흘낏 쳐다본 그의 눈은 붉은 색에서 어느새 파란 빛깔의 고운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우느라 붉은 색으로 충혈 되어 있었구나...

"아버지가 남긴 이름 토마스 뒤에 어머니는 한국 이름 덕만을 붙여 주셨지...우리들은 낙동강 가에 있는 외갓집의 과수원에 유배되어 살았네...사람들의 눈과 귀를 피하고 싶은 우리 외갓집의 고육지책이었겠지...내 어릴 적, 어머니가 이른 새벽, 사람들 눈을 피해 왜관에 주둔한 미군부대로 출근하고 나면, 나는 어머니가 역시 사람들 눈을 피해 돌아오는 밤늦은 시간까지 온종일 혼자서 과수원이나 낙동강 가 모래밭에서 놀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네...지루하고 약간은 무섭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내 일생 가장 복된 나날들 아니었나 싶네...언제 자네도 기회가 되거든 그 낙동강의 모래밭과 과수원에서 하루쯤 시간을 보내보게..."

"놀다가 지치면 아버지와 수많은 사람들의 피 흔적이 묻은 그 하얀 모래밭에 몸을 누이고 하늘을 보았다네...봄 여름 가을 겨울 그 강 위에는 늘 파란 하늘과 내가 벗삼을 구름들이 떠다녔지...강물을 보고 있노라면 그 강물이 하얀 구름들을 품고는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더군...열 대의 기차가 지나가면 해는 서산으로 젔네...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에게서는 늘 술 냄새가 났었네...술을 먹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으셨겠지....하루는 오줌이 마려워 잠을 깼더니 어머니가 안 보이시는 거야...보름 달 빛에 의지하여 어머니를 찾아다니다가 결국 낙동강 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어머니를 보았지...두 손으로 모래를 가득 담아 바람에 날리면서 서 계셨네...다가간 나를 보며 "아버지의 넋이란다..." 말하시던 어머니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지...어머니의 슬픔이 내게 전해져서가 아니라 나는 어머니를 곧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함께 울었네..."

"담배를 입에 대던 어머니는 기침을 하는 날이 잦아졌고, 어느 날부터는 출근을 하지 않은 채 나날이 얼굴은 창백해져만 갔었네...자리에 누운 어머니를 보며 외할머니가 하는 말씀을 듣고 나는 어머니가 폐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가끔 기침을 하다가 손수건에 피를 묻히는 어머니가 슬슬 두려워졌네..."

 그는 다시 감정이 격해진 듯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자네는 왜 서울을 가는가?"
"네. 취직 면접 시험 보려고 가는 길입니다."
"그래? 꿈이 많을 시기구만...어떤 회산가?"
"작은 무역회삽니다만..."
"자신은 있는가?"
"면접을 영어로 본다는데...사실 걱정이 좀 됩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좀 도움이 될 수 있겠구만. 내 이야기를 들어준 보답으로 내가 좀 도움을 줌세. 준비한 걸 한번 말해보게."
 영어로 준비한 자기 소개를 진지하게 듣더니 잘 준비했다고 칭찬을 하고는, 몇 군데 수정할 부분을 지적해주었다. 면접에서 활용할 간단하지만 유익한 문구들도 몇 가지 더 일러주었다.

"아까 하시던 이야기 계속하시죠..."
 이제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진 내가 재촉을 했다.
"그래...하던 이야기니 마저 해야지..."
 그의 파란 눈은 다시 과거로의 회상으로 흐릿해졌다.



...(하)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