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 동 댕~~~
이 얼마나 아름다운 멜로디인가.
자고로 음악은 단순할수록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 말이지.
히히히...
이소리는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다.
내가 무지막지 좋아하는 멜로디 소리다.
장담하건데 누구라도 고3이 되면 이 소리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끈끈한 눈빛의 일어선생님이 나가시고 어떤 아이는 먹는것조차 포기하고
그대로 책상에 푹 고꾸라지고
또 나같은 부류는 침침하던 두 눈에 갑자기 광채가 번쩍이기 시작하면서
활기를 찾는다.
오늘의 메뉴는 ? 돈까스란다...하하. 내가 좋아하는 음식중 서열로 쳐도 상위권에 속하는 음식이다. 이 아니 좋을쏘냐.
역시 사람은 자유가 최고 아닌가 ?
이렇게 점심 시간이 즐거운 이유는 먹는다는 원초적 본능 이외에도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해도 되는 자유가 허락된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 명희야, 오늘 돈가스 냄새 좀 나지 않냐? 난 냄새 난다 야.."
선경이 돈가스에 코를 박고서 킁킁 소리를 낸다.
" 아니, 난 괜찮은데..? 대충 먹어라 기지배야, 여기가 레스토랑이냐?"
한마디 아니 쏘아줄 수가 없다.
돈이 좀 남아나서 고민인 집안 딸래미라지만 남하구 같이 먹는데
저러는건 매너가 아니지..그럼.
선경이는 내 한마디에 새초롬해서는 입을 오물오물 억지로 씹는 시늉을 하지만
내가 속을 모를쏘냐.
맛없는건 죽어도 안먹는 애가 선경이며
메이커 아니면 입지도 않는게 선경이며
명품 상표를 얼마나 아는지에 따라서 교양 여부를 판단하는 애가 선경이...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부잣집 딸인걸 자랑스러워하고
그걸 드러내지 못해 안달난 애가 선경이인 것이다.
그런 애 하고 나는 둘도 없는 단짝이다.
내가 그애를 좋아하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건 아니다.
선경이는 부잣집 딸이다.
그래서 난 그애가 좋다.
그애의 지갑에는 늘 파란 지폐가 잠을 자고 있었고
떨어질만 하다 싶으면 또 두둑히 채워지고
어느날 부터인가는 지폐 대신에
요즘 누구나 다 몇장씩은 있다던
플라스틱 쪼가리가 차지했는데..
그것이 이른바 크레딧 카드라고 했고
그 플라스틱 쪼가리의 힘은 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 플라스틱 쪼가리의 힘을 맛본 나로서는 선경이를 좋아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생각해보라.
봄날...나른한 오후 수업이 끝나면 명목상 우리는 하교를 한다.
하지만 이건 말했다시피 어디까지나 명목상일뿐...우리는 각자 집안사정에 따라 선택한
학원의 갯수와 수준, 또는 개인지도,,..이런 것들에 의해 또다른 일과를 시작해야 한다.
그건 실로 엄청난 스테미너를 요구하는 일이라서
우리는 잘 먹어주어야 하는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대학을 위해서 우리는
영양가 풍부한 간식을 먹어야 하는 의무마저 떠안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의무를 지갑의 빈약함을 이유로 소홀히 할때의 슬픔이란 육이오 사변시절
양과자를 먹는 친구들 몰래 꿀꿀이 죽을 먹어야 했던 우리 부모님 윗세대쯤의 심정이랄까?
난 그쯤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선경이는 그런 슬픔 같은건 느끼지 않아도 되고, 그럴 필요조차 없단 사실은
매우 중요한 현실이다. 선경이는 다행이 먹는게 새모이만큼 양이 적었고 나는 그 남긴 음식을 이나라 환경을 위해서 이몸이 희생봉사하는 맘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애국심 정도는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로 선경이 앞에서 게걸스럽게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난 별로지만 니가 먹구 싶으면 먹어..
난 다이어트 중이야...
난 식탐이 없잖니, 먹는거 보다는 책을 보는게 낫지..
하면서 선경이의 속을 약간만 자극해주면 그날은 간식거리 걱정은 아니해도 되는 것이다.
특히나 잘 먹혀드는 방법은 다이어트 중임을 은근히 강조 하는 것이다.
사람들..특히 내 또래의 여자애들은 왜그런지 상대가 다이어트 한다고 하면
행여나 나보다 이뻐질까 싶어서 방해를 못해 안달이 난다.
난 그걸 이용하는 것 뿐이다.
...................
방과후 나는 또 선경이와 딱 붙어서 교문을 나섰다.
" 선경아, 나 요즘 살좀 붙지 않았니? 이상하게 둔하네..."
나는 역시나 오늘도 그 작전을 쓰기로 했다.
이작전을 자주 쓰는건 아니다. 선경이도 바보가 아니어서 가끔씩 써줘야 약발이 받으니까...
" 명희야 우리 피자 먹구 갈래? 나 피자가 먹구 싶어 죽겠는데 나혼자 못먹잖아..엉?"
하하...아까 점심시간에 내가 다른 이야기를 하는척 하면서
슬쩍 피자를 화제에 올렸다가 슬그머니 다른데로 말을 돌린적이 있다.
이러면 선경이는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피자집에 앉아서 피자와 스파게티, 샐러드, 콜라를 먹고 마셨다.
어제밤에 정말이지 피자 생각이 어찌나 간절한지 티비에서 주인공들이 피자를 먹는데
그거 한입만 먹어봤음 하는 치사한 생각이 들 정도였었다.
" 명희야, 난 있잖아, 나중에 대학가면 젤 해보고 싶은게 뭔줄아니?
남자애들이랑 미팅도 하고..그런것도 있지만
술도 마시고 늦게까지 돌아다니고 ...그런거다.
학원 빙빙 돌고 집에가면 또 과외선생 오는데 이젠 넌덜머리가 난다 증말.."
불쌍한 선경이..
나는 입시학원 한과목만 들으면 집으로 가서 티비를 보든, 퍼져 잠을 자든,
겜을 하든, 춤을 추든.. 다 내맘대로 할 수 있는데 선경이는 부모가 부자라서
자유가 없다. 정말 불쌍하다.
학원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가면 열시가 넘고 그때 오시는 한달에 백오십만원짜리 쪽집게 과외선생하구 졸음을 쫒느냐 속여가며 조느냐 그싸움을 해야 하니 정말 불쌍하지 뭔가.
피자집을 나와서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선경이와 내가 다니는 입시학원은 같지만 선경이는 거의 모든 과목을 다 듣고 있고
나는 수학 한과목만 듣고 있다.
선경이가 내 팔에 자기 팔을 끼워넣고 걷는다.
" 이담에 우리 있잖아. 대학가믄...포장마차라는데 꼭 가보자. 응?
거기가서 닭똥집? 그런거 있대지? 그거랑 소주도 먹구 라면도 먹구 하면서
낭만좀 즐겨보자.. 이건 인간이 사느게 아니야. 고3이 사람이냐? 에휴~"
선경이는 손을 허리춤에쯤 고정시키고 손바닥을 펴서 내게 살랑살랑 흔들어주고는
자기반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수학선생의 설명이 도무지 맘에 들지 않는다.
왜 저따위밖에 설명을 못한단 말인가.
내가 낸 돈이 얼만데..
저 선생 오늘 아무래도 수업준비를 안한 모양이다.
내가 수학 강의를 듣는건,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다.
나는 서울 상위권 대학은 골라잡아 갈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은 나오고 있고
수학은 특히나 좋아하는 과목이라서 거의 만점을 받는다.
수학은 얼마나 정확한가... 그러할 것이다, 라든가 아마도.. 라든가 란것을 용납하지 않는 수학.. 그래서 난 수학을 좋아한다.
선생이 돈을 받았으면 밥값을 해야지, 저래서야 어디 라면이라도 먹구 살겠는가.
지겨운 라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매일 애써 돌아서 가던 그 길을 택한다.
멀리서 포장마차의 불빛이 반짝인다. 겉으로 보니 손님이 제법 든것 같아 기분이 나쁘진 않다.
아마.. 엄마도 기분이 좋을 것이다.
저 포장마차는 내 엄마가 하는 포장마차다.
아빠없이 자식 하나 잘 키워보겠다는 일념으루다 어쩌구... 이게 내 엄마의 푸념 18번이다.
선경아 이 기지배야,
포장마차에서는..적어도 우리 포장마차에서는 라면 안팔어 알어?
낭만? 지랄하구 있네.
넌 라면은 엄마가 먹지도 못하게 하니까 그게 낭만일지 몰라도
난 어릴때 엄마 없는 저녁을 매일 라면으로 때워서 라면에 라자만 들어도
넘어오고 낭만이 다 도망갈라 한다.
오늘은 집에가서 밥을 좀 해놓아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든다.
저렇게 손님이 좀 든날은 정작 주인은 굶기 일쑤여서 아마도 엄마는 집으로 돌아올
무렵이면 허리가 휠 지경으로 허기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나중에 돈벌면 세상의 모든 라면공장을 다 사서 없애버릴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만 사는 집에서 라면만으로 사는 저녁이 없도록
깡그리 없애버릴 것이다.
그때 선경이는 내게 뭐라고 할까?
자신의 낭만을 홀라당 태워버린 내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