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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마일 2003-12-08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오전 10시를 넘어서도 내리고 있었다.

커피가 떨어져 슈퍼에 들렀다 오는길에.....우편함에 꼿혀 있는 카키색 봉함봉투가 보였다.

금박으로 쓰여진 글씨가 보였다.

뭘까.....?

내 방 호수인데.......304호.....서인희.....

뭘까.....?

누가 보낸거지....?

혹시...재명이가.....

힐끗 봤지만......그게 뭔지 알수 있었다.

보통의 청첩장은 흰색 봉투인데.......저건 색깔이 들어있었다.

재명이가.....청첩장을 보내 온걸까....?

그냥 봐도 .....뭔지 알수 있었다.

 

탁자위에 카키색 봉투를 펼쳐 놓았다.

참.........

기분이 착잡했다.

봉투의 겉면엔 진한 톤의 금색의 글짜가 찍혀 있었다.

휘장 까지.......

강우현.서민정......약혼합니다.

 

안에도 그보다 옅은 색의 종이가 들어있었다.

앞에.....에쁜 남자.여자 인형이 그려져 있고......안엔....

익숙한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이번주 토요일에......약혼을 하겠다는....

와서 축복해 주길 바란다는.....그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가슴 한복판에 망치가 내려져 있는 듯한 기분........

자꾸....때렸다 뉘었다 하는 오뚜기 망치처럼.....그렇게 내 가슴을 세게 때리고 있었다.

 

어머님이.....제주도에서 오셨다더니......

그래서 였구나.....

약혼을 더는 끌 수 없기에......

그래서 우현인......나 보기가 미안해서......

나와 마주 대하기가.......힘들었겠지.......

갑자기 서글픔이 밀려왔다.

 

그제 엄마의 전화가 생각났다.

평생.....남자의 그늘에서......뒷방여자로 살아남을 거냐는.....

차라리 .....그럴바엔 죽는게 낫다는.....

여기 오기전에 맘 독하게 먹고......오히려 우현이 옆에 있을 수 있게 되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왔는데......결혼은 없어도.....그건 문서상의 아무런 의미없는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고.....둘이 함께면 .....아무 걱정 없고......불행하지 않다고.....그렇게 여러번 다짐하고....다짐해서 돌아온건데.....이미 다 아는 사실이였는데....

벌써.....오래전에 체념하고 있었던 일이였는데......

새삼......이렇게 가슴에.....폭탄이라도 맞은듯이....

가슴 ....살 한점...한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은 없어야 하는건데......

아프다는 비명소리 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내게 남아있는......진이 다 빠져 나간건가......

 

전화도 없는 우현이가 야속했다.

내게 ....아픔이 될 얘기라는 걸 알았어도.......귀뜸이라도 해주지.....

언젠쯤.....어머님이 오셨으니까......곧 소식 있을거라구......얘길먼저 해주지.....

갑자기 맞은 뒤통수는......오래갔다.

고통의 시간도 길었고.......슬픔도 깊었다.

 

오후내내.....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득 거울에 비춰지는 ........저 넋이 나가버리 공허한 눈을 한 여자는 누구지...?

생각이 없는듯......몸안의 모든 정기가 다 빠져 나가 ......겉데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저 여잔 누구지....?

순간.....섬뜩하다는 기분도 들었다.

옷을 입고 있는데도......소름이 돋았다.

아까부터 올려 놓은 주전자의 물이 끓는소리......

삐삐 거리는 생소리......소름이 끼쳤다.

무슨 벌레라도 되는양......내 눈에 아프게 박히는 카키색이 봉투.....

머리가 아파왔다.

아무생각 할 수 없었다.

 

여기서.....손을 나 버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없어지면.....모두가 좋을것 같다는 생각........

웬지 마음이 가라않잤다.

브람스의 자장가를 들으면....아픈 눈이지만.....쉽게 감기겠지.....

마치 엄마의 품속으로 들어가듯이.....아늑함을 느낄수 있겠지....

 

비.....그리고 브람스......투명하리 만치 깨끗해 보이는......나......

자학일까....?

더는 살고 싶지 않다.

더는 깨어있고 싶지도.......아무것도 듣고 싶지도.....보고 싶지도 않았다.

 

의에로 .......손목에 와서 닿는 금속의 칼은 날카롭지 않았고......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욕조에 .......피 빛으로 물드는.......선명하게 풀어지는 빨간색 물감처럼.......내 안의 모든 감정이 .....다 쏟아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게......다 내 속에서 빠져 나가길 간절히.......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