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난 나름대로 다른 고통을 감수해야했다.
사고의 후유증 때문에 거의 잠을 설치는 것은 보통이었다.
옷 가방에 챙겨간 약을 매일 먹으면서 고통을 스스로 감당하고 이겨야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서울운동장 근처에 있는 제품 집 이었는데 그야말로
쉴 틈 없이 고된 노동이었고 일의 방식도 예전 내가 배우던 시절과는 너무나 많이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의상이 제품화되어서 의상실에서 맞춰 입었던 시대는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니 적응하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같았다.
거기다 아프지나 말아야하는데 여러가지로 상황이 좋질 않았다.
회사 책임자에게 도저히 할 수가 없다고 말을 하고...
그 분은 날 더러 아직도 명동같은 곳엔 의상실이 있다고
그런 곳이 어떠냐고 알아봐주겠다고...
감사한 일이었다.
난 그곳에서 나오면 당장 갈 곳이 없었다.
엄마한테 연락을 해서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수유리에 조그만 월세만을 얻었다.
그리고 회사에 다니는 4째와 막내 여동생을 데리고 함께 살았다.
달달이 엄마에게 월급을 보냈다.
방을 얻기위해 얻은 돈을 갚기 위해서였다.
명동에 있는 의상실에서 나 1년동안 일을 다시 배우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했다.
그리고 요새의 일 흐름에 대해서도 많은 경험을 얻었다.
어느 정도 난 자신이 생기고 어딜 가서라도 잘 할 수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이혼 이야기를 할까한다.
서울생활을 하면서 난 3개월에 한 번 법원의 통보를 받고 출두를 했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7개월만에 판사는 나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젠 정말 홀가분한 마음으로 생활할 수있을 것같다.
그 오랜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난 위자료 한 푼 받지 않았다.
그 사람은 줄 만한 능력도 없었다.
난 아무것도 그사람한테 바라는 것이 없었다. 얼른 악연을 정리하고 싶을 뿐이었다.
7년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6년 3개월의 결혼생활은 이제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이제 나이 31살...
아직은 난 젊다. 이젠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열심히 사는거야...
가끔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머리 아파서 고통스러운 것만 빼면 난 건강하다
난 이겨낼 것이다.
자신감이 생긴 나는 이젠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동안은 배운다는 입장에서 돈에 연연하지 않았다. 아주 절실해도 난 참아냈다.
어느 휴일날,
늦도록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시아버님을 만났다. 아버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셨다.
“ 아가~ 불쌍한 애기야 나를 용서해라”
“ 아버님 무슨 말씀이세요?”
“ 내가 부덕해서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구나”
“ 아니예요 다 제 탓이에요”
슬픈 얼굴로 계속 울고 계셨다.
나는 눈을 뜨려고 해도 떠지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려해도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 아버님............아버님~ ”
몸부림치다 어쩌다 정신이 들었다. 다시 눈을 감으면 다시 아버님이 보였다.
가위에 눌린 것같았다. 너무 무서웠다.
너무 심신이 허약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도 너무 생생하다. 이상할 정도로...
며칠 후에 우리 친정동생이 들은 이야기라며 알려줬다.
시아버님이 자살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난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슴이 아팠다.
‘ 죄송합니다 아버님’
난 그 후에도 가위에 눌러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난 또 하나님을 원망했다.
‘ 주여! 왜 이러십니까? 이젠 주님을 믿지 않으렵니다. 여적도 그랬듯이 내 뜻대로 살렵니다.’
흑흑흑...
‘ 이젠 내가 주님을 버리렵니다’
그런데 너무 황당한 일이 또 생겼다.
내가 직장을 간 사이 엄마가 월세 보증금을 빼서 가져가셨다고 주인이 말을 해서
난 너무 놀라고 분했다. 이유는 빚을 갚으려고 했다고... 참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옛날 버릇이 또 도지셨나?
난 동생과 또 뿔뿔히 흩어지게 되고
직장을 지금의 이대입구 쪽으로 옮겨서 다니게 되었다.
가지고 있던 돈이 조금 있어 월세를 또 얻어서 혼자서 살았다
월급도 많이 받았고 생활을 하는대는 내 약값이 많이 들어서
걱정이었지만 마음고생은 없었다.
말 버릇처럼 난 사람을 믿지 않았고 경계를 하는 습관이 들었다.
오로지 내 의지로만 살려고 노력했고, 그래야만 했다.
2년을 난 열심히 살았다.
1986년 봄
내 기술은 경지에 이르렀고 난 월급이 아닌 능력대로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
그 동안의 고생은 다 말 못한다. 많은 설음과 고통을 받았다.
제대로 일한 댓가를 받지 못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래도 난 꿋꿋하게 버텨나갔다.
그런데 예상치 않았던 일이 내게 또 벌어졌다.
동생하고는 연락을 하고 살아서 집안 소식도 종종 듣곤했다.
엄마한테서 어느날 회사로 전화가 왔다.
건강하냐느니... 밥을 잘 먹고 다니느니 시시콜콜 묻는 것이 어째 조짐이 좋질 않았다.
“ 무슨 일이예요? ”
“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 무슨? ”
“ 막내 지호가 이번에 대학을 낙방했어 ”
“ 그런데요? ”
“ 그런데 재수를 시키려는데...
서울서 학원이라도 보내야하는데 보살펴 줄 사람이 없어서...“
하시면서 말꼬리를 흐린다.
“ 뭡니까? 그러니깐 절 더러 지호를 절더러 재수를 시키라는 소린가요? ”
“ 미안하다 ”
“ 방은 얻어줄게 재수만 네가 시키면 안될까? 부탁한다 네 공은 잊지 않을께 응? ”
난 전화를 ‘탁’ 끊어버린다.
정말 해도 너무 하는군 이젠 자식까지 앞세워서 다 뺏어먹으려는군...?
도대체 이해가 안간다. 이혼한 자식한테 그리 하고 싶은지 말이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전화는 계속 하루가 멀다 하고 왔다.
정말 지겨웠다. 그렇다고 직장을 그만 둘 수도 없는 일이고...
나는 마음이 약하다. 못 이기는 체 이 번 한 번만 라는 생각으로
동생을 불러 내렸다. 엄마가 얻어주는 방으로 나도 들어가고...
헤어져 살던 다른 동생들도 같이 살았다.
직장도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집은 왕십리 내가 다니던 직장은 신당동 이었다.
버스로 5-6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였다.
난 거의 걸어서 다녔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어쩌다 늦으면 버스를 타고 버스할인권도 끊어서 다녔다.
나이가 32살이라도 내 나이를 그대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은 젊고 누가 봐도 난 대학생 정도로 보았다.
버스기사 아저씨도 속았다 진짜 학생인 줄 알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1년을 정신없이 난 일을 하고 밤 12시에 들어오는 일이 허다했다.
거기다 휴일엔 회사에서 일거리를 가져와 일을 했다.
서울엔 아는 사람도 없었다.
아예 알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직장에서까지 그러진 않았다.
같이 농담하고 즐겁게 일은 하지만 절대 남에게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로 마음을 준 사람은 없었다.
동생이 시험을 볼 때까진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용돈에서부터 학원비,차비... 생활비까지 누구하나 보태주는 사람없었고...
시험을 보고... 발표가 날 때까지 난 긴장이 되었다.
헛수고가 아니 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