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감기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나경의 몸은 심하게 떨려왔다.
몸은 떨려왔고, 장딴지는 오래 걸어 뻐근하니 저려왔다.
자정이 넘어서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고 보이지 않았고, 전화연결도 되지 않았
다.
충전도 다 되어 가는데....
띠띠 충전이 다 되어간다는 핸드폰 울림소리에 나경은 멀미라도 하듯이 가슴의 울렁거림이 심해져 구토를 일으킬 것만 같았다.
나경은 욱하는 헛구역질과 함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요? 충전이 다 되어간단 말야.."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으실 떨려오는 몸에 온기를 더해주기 위한 시도로 그녀는 커피 자판기 앞에 섰다.
엉?
가방 어디에도 지갑은 없었다.
입고 있는 코트에 두었나? 아닌데...분명히 가방 속에 두었는데....
아파트 앞에서 털썩 주저앉아 가방을 뒤적거리던 나경은 그때서야 날카로운 단도에 의해 가방이 찢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날치기를 당한 것이다.
잘못해서 부딪쳤던 아까 그 두 남자!
으앙!
다리에 힘이 쫙 빠지면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나경은 택시비를 지불하고 넣어두었던 만원 권 지폐 두 장에 그나마 안도의 숨을 내쉬긴 했지만, 집으로 돌아갈 택시비는 되지 않았다.
"기혁씨...나, 추워...나, 소매치기 당했어..그리고, 하루 왠종일 굶었단 말야..너무 피곤해...여기 피씨 방이야, 충전이 다 돼서 이제 폰으로 전화도 할 수가 없어...일루 전화해줘."
핸드폰은 완전히 먹통이 되었고, 기혁을 만나지 못할 거라는 절망상태에 빠져든 나경의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질 않았다.
새벽 두시.
마지막이라는 결정적인 생각으로 피씨방을 나와 다시 그의 아파트 앞으로 왔다.
그러던 나경의 눈이 번쩍 뜨였다.
기혁이었다!
어둠이 깔려 있어 그는 나경을 보지 못했지만, 나경은 그를 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금껏 그녀를 떨게 했던 불안과 절망과 회의스러움이 싸그리 사라지고 있었다.
차에서 백과사전 두께로 열 권쯤은 되는 책을 가슴에 껴안은 기혁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경비원에게 아주 경쾌한 음성으로 인사까지 하는 것으로 출장 다녀왔던 일이 아주 잘 된 모양이었다.
나경은 그제서야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그를 기다릴 수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자 핸드폰의 음성을 확인하고, 이내 달려와 줄테니 말이다.
4층까지 층계를 올라 집으로 들어섰을 테고, 전원을 올려 내부를 밝게 한 다음...책을 내려놓고 훅하고 한숨을 내쉬겠지, 그리곤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고...습관처럼 핸드폰의 전원을 켜는 거야. 그리곤 놀래서 밖으로 달려 나와 줄 거야.
나경은 그렇게 순서를 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나오겠지, 나오겠지...하는 시간이 그렇게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전화 확인 이전에 샤워를 하는 것일까? 음...마음에 들지 않지만...워낙 깔끔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또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기혁씨....기혁씨?! 나경이예요."
소리쳐 불렀지만, 그는 기척이 없었다.
나경은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지만, 주먹 쥔 손으로 현관을 쾅쾅 두드렸고, 발로 현관문을 걷어차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절망스럽게도 모습을 내비쳐주지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함과 초라함으로 사지가 조각조각 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계속되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뭐라고 한 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기혁에 관한 한 더 이상의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녀의 마음이었기 때문에 , 그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따르릉...
핸드폰이 연신 울리고 있었지만, 가방 속에 있는 폰을 꺼내기 위해서 몸을 일으켜 세울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만 끊어지면 좋으련만...
핸드폰은 연신 울리는 것으로 눈을 뜰 기력도 없는 나경을 일으켜 세웠다.
받는 것과 동시에 꺼져 버린 핸드폰의 전원 자체를 꺼버리려던 손가락의 움직임에 앞서 다시금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을 귀에 갖다대었다.
"여보...으음..."
목이 잔뜩 잠겨버린 나경은 두 어 번의 헛기침 소리를 내어보았지만,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처럼 소리내어 말할 수 없었다.
"나경아! 너 지금 어디니?!"
기혁이었다.
"김 나경. 어디냐고 묻잖아."
"집이예요."
"뭐? 어디라구?"
"집이라구요."
"지금에서야 니 음성을 들었다. 바보같이 여기까지 와 놓구선 그렇게 가버리냐? 올라오지 않구서..."?
"그랬어."
"뭐? 뭐라구?"
"그랬다구!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이름을 불러도 기혁씨가 나와주지 않았을 뿐이지..."
"뭐?!...음...그랬구나..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출장 갔던 일이 잘됐다고 사장이 술을 내는 바람에...들어오자마자 넉다운 됐었어...씻지도 않고...아침에 일어나 보니 옷도 입은 채드라구..."
"........"
"음성이 열 개도 넘게 들어와서 놀랬어, 집에 무슨 일있나 하고 말야...놀래서 들어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너였어.."
"집에 일 있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겠네요."
"뭐라구?"
목이 잔뜩 잠긴데다, 누운 상태로 전화를 받고 있는 나경의 목소리가 옳게 그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나경은 비스듬히 몸을 일으켜 벽을 의지해 앉았다.
"집에 일 있는 거 아니라서 다행이라구요."
"그래....왜 갔어? 힘들 게 온 건데...아침에 다시 전화주지 그랬니?"
"기혁씨가 날 완전히 가슴에서 밀어 내버린 거라고 생각했었어..."
"바보구나...어떻게 그런 생각을..."
"당연히..아주 당연히 내게 와주리라 생각했었는데...기혁씬 그러질 않았잖아.."
"말했잖아, 술에 아주 쩔어서 바로 골아 떨어졌었다구..."
"그걸 내가 알 리가 없잖아...아파트 불은 그대로 켜져 있는데...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어...얼마나 울었는지 바보같아 보이는 얼굴도 상관없었어... 얼마든지 더 기다릴 수 있었지만, 기혁씨가 날 가슴에서 밀어 내버렸다는 절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그래..."
기혁은 그래, 그래 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사랑을 의심한 적이 있었다.
가상 속의 인물을 만들어내는 그녀의 글처럼, 그녀의 말과 행동이 가식적인 것은 아닐까...조금은 어눌하고, 또 조금은 맹한 만큼 순박한 그녀의 성격마저 스스로 연출해 낸 것은 아닐까...
그렇게 의심하고, 다시 생각했었던 자신이 머저리 같았다.
자신을 향한 그녀 사랑의 진위조차도 분간하지 못했던 자신의 우둔함을 한탄하면서, 기혁은 손가락으로 코끝을 매만졌다.
코끝이 찡해졌기 때문이었다.
숨죽여 우는 여린 흐느낌이 전화선을 타고 그대로 선명하게 전해지는 그녀를 따라 울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기혁씨..미안해."
"응? 뭐가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에 이어질 그녀의 다음 말이 두려웠다.
너무 두려워 전화기를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안한데...나 좀 누워야겠어...핸드폰 들고 앉아있을 기운도 없어...미안해, 기혁씨."
"아냐! 아냐..자, 누우라구...나중에 다시 전화하면 되지..."
나경은 스르르 미끄러지듯이 침대로 누워 이내 잠이 들었다.
그녀는 며칠을 내리 않아 누웠다.
몸살도 아니고, 감기도 아닌데...춥고 기운이 없었다.
밥도 먹히지 않았고, 깊은 잠도 들지 못했다.
어머니는 딸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고단해서 그런다며 얼버무렸다.
여러번 승규의 근황을 물어보는 것으로 이것저것 떠보았으나, 그녀는 그때마다 회사 일이 무척 바쁘더라고만 말하고 지나쳤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야릇한 비현실감에 빠졌다. .
무엇이 자신의 현실이고, 어떤 것이 자신의 현실이 아닌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가수면 상태에서 지친 듯 며칠을 앓고 지냈다.
그녀의 그런 행동은 어머니에게 쿠데타 같은 경악감에 빠지도록 했다,
잠깐 나갔다오겠다면서 날밤을 새우고 들어온 그 날 이후..딸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게 염려되고, 왠지 불길하게도 느껴져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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