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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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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귀국


BY 순복이 2003-06-14

동네로 들어가는 입구도 많이 바껴있었다.
뽀오얗게 먼지 날리던 길은 튼튼한 시멘으로 포장되어 있었고 굽이 지던 논은 경지 정리로 바둑판처럼 반듯했다. 그래도 아직 공기만은 변함없이 상큼하게 코끝에 와 닿아서 나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 마셨다. 미국에서 출발해서 거의 하루가 걸리다시피한 비행과 서울에서 내려 바로 탄 기차, 그리고 다시 버스, 온 몸을 적셔 오던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듯 했다.
이른 아침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서울대 합격하고 내 이름의 현수막이 걸려있던 면 사무소 앞의 나무도 훌쩍 자라 무성한 잎을 달고 있었다.
몇년만인가?
아재의 위독과 부고, 어머니는 두 번씩이나 간곡하게 아들의 귀국을 종용했지만 나는 끝내 귀국하지 않았다. 그럴 마음도 이유도 없었다.
미운정일까? 그러나 어머니는 아재의 죽음을 알리며 가늘게 훌쩍이기 까지 하셨지만 나는 어머니의 용돈과 같이 조의금이나 조금 보내겠다고만 했다.

'개만도 못한 인간'

그 날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제사를 다 지내고 음복까지 끝내고 모두 새벽녘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막 아버지도 두루마기를 벗고 잠자리에 드려는 순간, 벌겋게 충혈된 안구를 하고 아재가 방문을 열고 불쑥 들어왔다. 아버지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형수, 속이 안 좋은거요? 아니면 애새끼라도 뱄소? 오늘 왠 헛구역질을 그렇게 많이 허요?"

어머니는 한쪽 벽만 응시하고 있다가 '애새끼'라는 말에 흠칫하며 아버지를 살폈다.

"밤이 늦,늦었네. 내,내일 하고 그만 가 가 보게"

아버지가 미간을 바르르 떨며 더듬더듬 아재에게 말했다.그러나 어머니는 매몰차게 아재를 보고 한 마디 내뱉었다.

"남이야 애를 뱄던 말던 서방님이 왠 참견이예요? 이제 그만 돌아가요!"

"아니 이 썅년 좀 보게. 서방질 한 년이 뭐 잘났다고 주둥아리를 놀리고 있어. 주둥아리고 아랫도리고 확 찢어 버릴라"

아재는 기다렸다는듯이 철썩하고 어머니의 귀싸대기를 올렸다.

"그래. 이 놈아. 죽여라.죽여.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나도 이제 너 지긋지긋 해. 나도 살고 싶지 않아.!"

어머니가 아재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래 이 년아, 내 오늘 너 뱃대지 애새끼 떨어지게 해 주마!"

아재는 어머니에게 발길질을 했다. 아버지는 말린다고는 했지만 아재한테 한 번 와락 밀리고 나서는'어허'하고 발만 구를 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아버지 저러다 엄마 죽겠어요. 어떻게 좀 해 봐요."

"어허 참"

나는 여전히 서 있기만 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있는 힘을 다 해서 아재를 밀었다. 술이 취한 아재는 휘청하더니 그제서야 발길질을 멈추었다. 엄마는 신음소리조차 못 내고 있었다.

"아재가 뭔데 우리 엄마 때리고 그래요?"

나는 아재라도 가만 두지 않겠다는 듯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아재는 그런 나를 잠시 보더니 갑자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허탈한 웃음을 한바탕 쏟아내더니 비틀비틀 집을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야속하다는 듯 그런 아버지를 매몰차게 뿌리쳤다.

"나는 당신이 왜 저 인간을 안 말리는지 다 알아요. 그래 당신 속도 후련해요?

"당신도 어디 말 한 번 해 봐요. 난들 좋아서 어데 그랬어요 ?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와서 아버님과 어머니가 시켜서 그랬던 것 뿐인데 왜 이제 와서 모두 나보고만 그래요. 서방구실을 못한 사람이 누군데... "

"그만 두지 못해! 애 듣는데서"

아버지는 소리는 지르고 있었지만 그 소리에는 무엇인가 잃기라도 할까하는 불안함이 묻어났다.
나는 어머니의 그 말이 몹시 신경쓰였지만 못 들은 것으로 하기로 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언어학 박사가 된 지금까지도.

나는 집까지 걷기로 했다. 어릴 때 빨리 걸어도 거의 삼십분이 걸리던 거리가 지금은 약 십여분이면 충분 했다.

"빠아앙"

버스의 경적소리에 옆으로 길을 비켰다. 옛날에 다니던 새마을 버스는 없어지고 읍내에서 바로 저 윗동네까지 다니는 버스였다. 버스가 멈추어 서더니 앞문이 철커덕 하고 열렸다.

"타세요!'

사람좋아 보이는 얼굴의 기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말씀은 고맙지만 걸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기사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뭔가 아쉬운듯 다시 버스를 출발시켰다.

도랑은 이미 제 역할을 잃은 듯 물도 말라 있었고 파아랗게 이끼가 잔뜩 끼어 잇었다. 수도가 들어 오고 세탁기가 보급되면서 일부러가 아니고서야 도랑에 빨래를 하러 오는 사람은 없는 듯 햇다. 가뭄에 논에 물을 대는지 낡은 양수기가 한 대 설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


아직 대문을 열어놓지 않아 돌로 받쳐져 있던 파란 대문을 밀고 들어 섰다. 그때 막 방문을 열고 나오던 동생 순화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머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