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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BY 순복이 2003-06-05

마을에서 한 대 뿐인 대동 경운기, 어버지와 같이 부역을 갔다 오는 몇명의 아저씨들과 같이 아버지도 내리고 있었다.
예정대로 라면 오늘 아버지가 와서는 안 된다. 이번 주 일요일 쯤에야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버지는 집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보퉁이 하나를 어깨에 메고 무슨 개선 장군처럼 걸어 오고 있었다. 오늘도 보퉁이 안에는 분명히 '보름달' 카스테라와 우유몇개가 들었을 것이다. 카스테라는 달아서 싫고 우유는 맛이 싱거워서 못 먹겠다면서 아버지는 꼭 중참을 먹지 않고 집으로 들고 왔다. 사실 그 카스테라는 엄마가 무척 좋아하는 빵이었다.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곧 나는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숨이 차 올라 나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아버지~"

집 쪽으로 한 번 쳐다보고 나는 최대한 큰 소리로 아버지라 부르며 아버지 한테는 짐짓 놀란 척하며 달려갔다.

"아버지,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으응, 부역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 듬어며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몸에서 시큼한 땀냄새가 났다.

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대문앞에 놓아 두었던 상추를 들고 태연하게 아버지와 같이 대문 안으로 들어 섰다.
마루에는 엄마도 아저씨도 보이지 않았고 집 안은 고요했다. 내가 나올 때만 해도 열려 있던 여닫이 문이 안으로 ?? 당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엄마는?"

"새마을 버스 기사 아저씨가 와서..."

대문을 들어서다 말고 아버지가 얼어 붙은 듯이 멈춰 섰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더니 아버지가 되려 들키기라도 할까봐 조심스럽게 나를 대문 밖으로 끌었다.
앞으로 일어 날 일을 생각하며 바짝 긴장해 있던 내 몸은 순간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 왜 그래요?"

아버지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면서 능청스럽게 물었다.아버지는 집과 조금 멀어 진 뒤에야 대답했다.

"응, 저 논에 먼저 가 본다는 것을 깜빡 잊었네"

아버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새마을 버스 아저씨랑 엄마가 같이 있다니까요. "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거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까 봤는데 나 나오고 나니까 방문도 꼭 잠겨 있었어요. 엄마랑 아저씨는 같이 방 안에 있는게 틀림 없어요."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그래서 나는 더욱 바짝 약이 올랐다.

"어쩌면 방 안에서 아저씨가 엄마 손을 잡을지도 몰라. 아니 뽀뽀도 할 지 몰라."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흠악해졌다.나는 속으로 이제 됐다 싶어 쾌재를 부렸다.이쯤 되면 아버지가 아마 부엌 칼이라도 들고 엄마와 아저씨가 있는 방으로 뛰어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는 나의 뺨을 한대 '철썩"하고 후려쳤다. 정말 별이 번쩍 하는 것 같았다.

"이 녀석이 못하는 말이 없어. 어디서 못 된걸 배워가지고. 네가 어른들 사이의 일을 뭘 안다고 그래!"

아버지의 핏발 선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의 목을 조를 것 만 같았다.그러나 나는 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바보야. 바보! 겁쟁이!"

나는 다시 한 번 아버지가 나를 후려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길 옆의 풀밭에 힘없이 털썩 주저 앉았다

"그래 너는 겁쟁이인 나를 닮지 않았구나. 많이 아프지? 여기 앉아 봐라"

아버지가 너무 미워서 앉고 싶지 않았지만 멀지감치 떨어져 앉았다.이 일에 대해 아버지와 담판을 짓고 싶었다.

"맞다. 아버지는 네 엄마가 어디라도 가 버릴까봐 참 겁이 난다. 호강을 한번 시켜 줬나 그렇다고 서방노릇을 제대로 했나.물론 아버지도 네 엄마가 미울 때가 있다. 그래도 어디 도망 안 가고 이렇게라도 살아 주니 아버지는 엄마한테 고맙다."

아버지의 말이 잠시 끊겼다.

"처음 시집올 때 네 엄마 정말 예뻤지. 하늘의 선녀가 따로 없었다. 외가집만 조금 잘 살았으면 내가 네 엄마같은 처자한테 장가가는 것은 가당치도 않았지. 그래도 좀 산다는 말 듣고 노총각한테 시집 와보니 오자마자 네 큰 아버지 노름으로 집이고 땅이고 다 날리고 네 엄마랑 큰집에서 정말 숟가락, 밥그릇 하나 달랑 들고 나왔지. 그래도 네 엄마 야무지게 살림해서 빈 손에서 논 댓마지기 장만했지. 못난 서방이지만 네 엄마는 그래도 이 아버지한테 참 잘 하려고 했다. 그런데...흑흑흑"

아버지는 말을 더이상 잇지 못했다. 이미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버지의 초라한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