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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우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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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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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BY 순복이 2003-06-04

학교 갔다 집에 오니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저수지 공사에 부역을 나가서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지만 엄마 마저도 없어서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병욱이랑 딱지치기라도 할 요량으로 다 쓴 공책을 북북 찢어 딱지를 접었다. 한 예닐곱개를 접다가 그대로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꽤 오랜 시간 잠을 잔 듯 했다. 밖이 어둑 어둑한 게 저녁인지 새벽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학교 갔다 와서 바로 잤으니까...'

가만히 더듬어 보니 틀림없는 저녁 시간이었다.
밖에서 누렁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아차 싶어 나는 잠에서 깨어나 발딱 일어났다. 소 굶기지 말고 제 시간에 맞춰 여물을 주라는 아버지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아버지가 없으면 쇠죽을 끓이거나 소꼴을 베는 거의 내 차례였다.
점심 때도 깜빡 하고 말았는데 황급히 고무신을 끌고 나가보니 누렁이의 커다란 입이 뻐끔뻐끔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누렁이가 꼬리를 한 번 흔들자 등에 붙어 있던 날파리들이 뿔뿔히 흩어졌다.
얼른 여물을 구유에 넣고 양동이로 물을 길어 와 섞어 주었다. 누렁이는 배가 고팠는지 잘 먹었다.
그때 누군가가 대문을 들어섰다.
엄마였다. 어딜 갔다오는지 곱게 단장되어 있었는데 가까운 데 갔다오는 옷차림은 아니었다. 나를 보고는 살짝 미간에 주름을 잡는 것 같더니만 곧 엄마는 가지런한 치아가로 나를 보고 생긋 웃었다. 뭔가 좀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미안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큰 덩치의 또 한 사람이 대문 안으로 불쑥 들어섰다. 새마을 버스 기사 아저씨였다. 깜짝 놀라 순간 나도 모르게 주위를 돌아 보았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떤 표정으로 그 두 사람을 맞아야 할 지 몰라 나는 차라리 아무 표정을 짓지 않기로 했다.

"어이!골목대장 안녕?"


아저씨의 밝은 인사에도 끝까지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엄마가 나에게 와서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어면서 말했다.

"음, 아저씨가 말이야. 목이 말라 물 한 그릇 얻어 마시러 오셨어. 아저씨가 왜 너도 버스 공짜로 많이 태워 주셨쟎니? 그리고 엄마도 많이 태워 주셨거든. 그래서 엄마가 고마워서...아저씨 물만 마시고 금방 가실거야. "

늘 말이 길지 않았던 엄마의 말이 처음으로 굉장히 길다고 생각되엇다. 엄마는 나에게 말을 하면서도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체 눈은 아저씨에게서 떼지 않고 있었다.
내 표정의 변화가 조금도 없었음에도 아저씨는 마루 끝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엄마는 펌프에 물을 한 바가지 넣고 펌프를 시루기 시작했다. 두 사람 다 너 까짓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듯 했다. 몹시 무시당한 것 같아 화가 났다.
펌프를 시루었지만 물이 잘 나오지 않는 지 엄마는 물을 한 바가지 더 부었다. 그런 엄마 곁으로 씨익 웃으며 아저씨가 다가갔다. 말없이 엄마를 비켜서게 하더니 힘자랑이라도 하듯 근육질의 단단해 보이는 팔로 펌프를 힘껏 시루어 댔다. 금방 물이 콸콸 쏟아졌다.
그 순간 만큼은 엄마와 내가 '우리' 가 아니라 아저씨와 엄마가 '우리' 가 되어 있는 것 같아 그런 엄마가 몹시 멀게 느껴졌다.

"어~어~ 시원하다~"

펌프에서 쏟아지는 물에 바로 입을 갖다 대어 물을 벌컥벌컥 마신 아저씨가 좀 과장된 소리로 말했다.

'씨팔~ 물 한 그릇 쳐 먹을 때가 그렇게 없나!'

말 그대로 물을 먹었으면 곧장 갈 것 이지 아저씨는 다시 마루에 터억 걸터 앉았다. 나도 조금 거리를 두고 옆에 터억 걸터 앉았다.
순간 엄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야, 너 공부는 잘 하냐?"

별로 궁금해 하는것 같지도 않는 표정으로 지지리도 공부 못 하게 생긴 아저씨가 물엇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야 이녀석아,어른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너 그럴려거든 밖에 나가서 놀아"

그제서야 엄마는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 말은 대문을 들어 설 때 부터 엄마가 진즉에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무슨 시위라도 하듯 여전히 대꾸를 안은 체 그냥 앉아 있었다. 엄마와 그 사람, 그리고 나 그렇게 세 사람 사이에 길고도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엄마였다.

"아 참, 뭐라도 대접해야 되는데 내 정신 좀봐 !"

그러면서 엄마는 물통에 동동 띄워져 있던 수박을 건져서 쟁반에 담아왔다. 넙적한 부엌칼로 단번에 수박을 두 동강 내더니 먹기 좋게 쏭쏭 썰었다.
엄마는 가운데 조각을 골라 아저씨에게 권했다. 수박을 권하는 엄마의 두 손이 참 고왔다. 그러나 나에게는 먹어보라는 소리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대신 허연 대문니로 엄마가 권한 수박을 한 닢 깨물던 아저씨가 좀 미안한 듯 수박씨 내 ?n듯이 한마디 했다.

"먹어라!"

그제서야 엄마도 먹어라고 했지만 얼굴에는 짜증과 초조함이 베어났다.
나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가 없었다. 섧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지나가던 사람이라도 들어 오면 어떡하나 하나 불안해서 견딜 수 가 없었다.
아저씨가 세 개 째 수박을 야금야금 먹고 있을 때 자리에서 일어 섰다.

"어딜 가려고?"

묻고는 있었지만 엄마의 얼굴에는 희색이 비쳤다.

"좀 놀다 올께"

나는 정말 놀러 갈 때라도 있어서 가는 것 처럼 당당하게 대문밖으로 뛰어 나왔다. 당산나무에 가면 지금이라도 병욱이랑 아이들이 몇 있을 수도 있었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다른 날과 달리 일찍 들어 오라는 말을 엄마는 하지 않았다.
대문밖에서 서성거렸다. 그 때 저어기에서 큰 엄마가 오고 있었다. 동네가 집성촌이다 보니 일가 친척들이 거의 한 동네나 다름없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큰 엄마도 우리 집과는 많이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렇게 볼 때 지금과 같이 외간 남자를 집에 까지 끌어들이는 엄마의 행동은 실로 대담하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밭에라도 갖다 오는지 소쿠리에 푸성귀가 가득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큰 엄마는 지나는 길에 꼭 집에 들리고는 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 가 버릴까 하다가 그만 큰 엄마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저녁 시간 다 된는데 너 어디 가려고?"

"아, 예. 그냥..."

나도 모르게 말이 더듬거렸다.

"얘가 왜 이래? 엄마는 집에 있어?"

있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안절 부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아직..."

"왜 또 어디갓어? "

큰 엄마의 물음 속에 '또' 라는 말이 걸렸다.

"모르겠어요. 학교 갔다오니 없대요. 아마 논.논에 갔나봐요"

"그래, 저녁은 먹었어?"

"아뇨. 놀고 와서 먹으려구요"

나는 잔뜩 배에 힘을 주었다.

"에구, 니 에미도 참!"

큰 엄마는 혀를 끌끌 찻다. 그래도 다른 친척들에 비해 비교적 엄마한테 살가운 편이었다.

"상추나 좀 놔두고 가야겠다"

큰엄마는 대문으로 들어 서려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대문을 가로 막을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런데 마침,

'아니다. 할머니 밥이 늦어서 그냥 가봐야 겠다. 네가 집에 갖다놓고 놀러 가라'

하면서 큰 엄마가 대신 한 움큼의 상추를 집어 주었다.

"엄마 안 오면 나중에 밥먹어러 와. 큰엄마가 맛있는 된장 끓여 놓을께"

큰 엄마가 저쪽 골목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겨우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었다. '휴'하고 돌아 서는데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정말 큰 일은 그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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