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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여심 호박꽃 같아라


BY 아지매 2003-07-15

그녀가 신문사에 다녀오던 날부터 흩뿌리던 빗줄기는 기나긴 장마로 이어졌다.

가느다란 가랑비로 시작한 비는 뇌성을 동반한 장대비로 이어져 그녀를 비창살에 가두었다.

그래서 일까. 모처럼 시작하려는 자신의 일이 시작하기도 전에 좌절되지는 않을까. 또  마흔의 나이에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착잡하였다.

이력서를 낸지 일주일. 아마 지금쯤  연락이 올 때도 된것 같은데 신문사에서는 통 감감 무소식이니 그녀로선 속이탈 수 밖에....

그녀는 이런 애타는 심정을 식히기라도 하려는 듯 창문을 열어제쳤다.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실려온 빗줄기가 그녀의 얼굴에 흩뿌려져 시원함을 넘어 차가웠다.

 차가운 빗물세레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재빠르게 창문을 닫고선  얼굴에 묻은 빗물을 손바닥으로 훔쳐냈다.

"어휴, 바람까지 불어 문도 열 수 없으니...."

그녀는 답답한 마음을 바람에 쏟듯 투덜거렸다.

 하지만 바람은 이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베란다를 타고 오르는 호박잎을 산들 건드리고 휘윙 저만치 물러섰다.

 산들거리는 호박잎 사이로 현기증이 나도록 샛노란 호박꽃이 활짝 피어  곧추 세운 수술을 과시하고 있었다.

 기나긴 장마는 그녀를 빗창살에 가두어 놓고 그렇게 호박 넝쿨을 열심히 키우고 있었다.

그녀는 온 창을 뒤덮고도 모자라 화단 나무 위까지 점령한 호박 덩굴의 야심이 더한층 부러웠다. 늘 안으로 안으로 접어들기만 했던 자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호박 덩굴 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더구나 두리뭉실한 아낙의 엉덩이 같은 호박을 꿈꾸며 엄지만한 호박을 달고 피어난 암호박꽃은 앙증맞기까지 해 문득 혼잣말처럼 나직히 읊조렸다.

"누가 호박꽃을 못생겼다고 했을까. "

널찍한 잎 사이로 노랗게 피어난 숫호박꽃의 기상이 탐이난 남정네의 질투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곧추 세운 수술이 쑥스러운 아낙의 수줍음이 흘린 이야길까 하고 나름대로 짐작한 그녀는 세인들의 편견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그리곤 나물, 부침, 죽, 떡 등 각종 요리에서 세인들의 입맛을 풍요롭게 하면서도 꽃중에서 제일 못생긴 꽃으로 간주되어 푸대접을 받는 호박꽃이 꼭 우리 옛어머니들의 운명 같아 서글펐다.  며느리. 아내. 어머니라는 가지를 뻗어놓고 어느 한군데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루 사랑을 나눠주어야 하는 운명을 숙명처럼 푸대접 속에서도 군소리 없이 이어온 명맥이 두툼한 호박 줄기마다 툭툭 불거져 투영되었다.

'그래, 저것이야. 동아줄처럼 이어져 두리뭉실한 꿈을 키우는 우리 정서.'

그녀는 불현듯 마흔의 나이가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마흔은 기울어 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단단하게 가지를 붙드는 버팀목으로 자리굳힘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새로운 용기가 솟았다.

"그래, 가족이라는 단단한 가지를 키우던 사랑의 버팀목으로 내 자신을 위한 가지를 새롭게 키워보는 거야. "

 

오후가 되자 영영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빗줄기가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삐꼼히 햇살이 내리비쳤다. 그녀는 희미한 빛이었지만 여간 반가운게 아니라 굳게 닫은 창문을 활짝 열어 제쳤

 다. 눅눅한 기운이 조금이라도 빠져 나가길 바라며 장농의 문을 열고 선풍기를 세게 틀었다.

 "윙-"

세찬 바람에 장농의 옷들이 허수아비처럼 흔들거렸다.

찬장도, 신발장도 열어 선풍기 바람을 쐬어 눅눅한 기운을 없애고 나니 마치 샤워를 막 끝낸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이 기분을 더욱 만끽하고 싶어 숨을 깊게 몰아쉬려는 순간 그녀의 숨을 막는 소리가 있었다.

 "삐리릭. 삐리릭.."

전화벨 소리였다. 분명 전화벨 소리였다.

그녀는 스프링이 튕기듯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으나 낯악은 목소리

"나, 102동 . 뭐해. 부추전 붙였어. 먹으러 와."

 기대와 다른 실망에 애들 올 시간이라는 핑계를 대어 거절하곤 수화기를 놓았다.

수화기를 놓은 그녀는 불현듯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신문사 사람들 해도 너무한다. 되던 안되었던 결과는 통보해주어야 할 텐데 통 감감 무소식이니 ........

투덜투덜, 궁시렁궁시렁거리며  불안함 같은 눅눅한 기운을 다 날려버리기라도 하려는듯 선풍기 바람을 구석구석 쏘였다.

 "윙-위잉---"

그녀가 30분 동안 선풍기 모가지를 휘둘러 대었을까.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앞서와는 다르게 천천히 전화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별 대수롭지 않은 전화려니 하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귀에다 갖다대었다. 

 "여보세요. 00신문사입니다. 000 씨 좀 부탁드립니다."

" 예. 저인데요. 그렇지 않아도 연락이 없어서 무척 궁금하였는데...."

"아. 죄송합니다. 요즘 홍수 피해 취재로 눈코 뜰새 없이 바빴습니다. 그래서 연락이 좀 늦었네요. 합격입니다. 앞으로 좋은 기사 부탁합니다. 참 그리고 내일 신문사로 방문해 주세요. 간단한 리포터 교육과 다음 주 기획에 대한 회의가 있으니까요."

그녀가 수화기를 내려 놓았는데도 긴 장마 끝 먹구름 사이로 내 비치는 서광처럼 신문사 팀장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자신이 신문사 리포터가 되었다는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늘 가족의 그늘로 자리한 그녀였기에 자신의 날개짓에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윙=

부산스럽게 돌아가는 선풍기처럼 그녀의 머릿속은 이런 저런 생각들로 혼란스러웠지만 또렷하게 부각되는 하나가 중추를 향해 질주한다.
'아, 마흔의 나이에 새롭게 펼쳐질 나의 가지. 어떤 열매로 가득 채워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