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런 풍성함에도 너무 어린 아이들에겐 외로움과 사람이
그리워지는 마음에 목말라야 했다.
십여채 조금 넘는 산골에서 그나마 새터라 불리는 윗동네엔 서너채,
아랫마을 본마을은 십여채나 됐을까?
그곳에 젊은 사람이 몇 안되다 보니 아이들 또한 그리 많지 않았다.
공휴일이나 돼야 다 모이는 아이들이 여섯, 일곱이다 보니
다섯살 계집애에겐 참 할 일없이 심심한 곳이기도 했다.
나이가 좀 찼다 싶은 아이들은 읍내 초등학교로 한시간여 걸어나가
다녀야 했기에 그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진 무진장 심심해야 했다.
"초애야, 니 거기서 뭐하니?"
"...."
"언니, 오빠들 기다리나?"
"예-"
"핵교에서 올라믄 아즉 멀었는데, 집에 가서 좀 더-- 있다 오니라"
"...."
아직 모두들 돌아올 때가 안됐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다.
아무도 없이 정적만 감도는 텅빈 집안이 온몸을 조여 오는 듯해서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던 까닭에 동네 끝자락에 머물며, 물레방아
소리에 귀 기울여 홀로 콧소리를 흥얼대며 죄없이 버려진 잔나무
가지를 휘둘러 땅도 파보고 이것 저것 그려보기도 한다.
혹여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생겨 빨리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어이없는 기대를 가져 보는 것이다.
몇몇 지나던 어른들이 혼자 애궂은 땅만 파재키는 모습에 한마디씩
거들고 물어보자 이유없는 짜증에 내딛기 싫은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날마다 들고 나는 집안이 오늘 따라 더 황량하다 못해 무섭기 까지
한다.
"할아버지 빨리와, 무서워--잉"
누구하나 들어줄 이도 없건만 무서움과 설움이 복받친다.
들일나간 노인네들이 돌아오려면 끼니때나 돼야 할텐데 아직 그들이
돌아오기엔 때가 아니다.
흙범벅이 된 손으로 문지른 얼굴은 눈물자국과 흘러내린 콧물로 인해
얼푹이져 볼썽 사납기가 여간 아니다.
얼굴이 그러할진데 옷인들 성할까?
서러움이 어느정도 진정되자 뿌연 시야에 장독대가 눈에 들어왔다.
"옳지! 사금파리를 주워 소꿉장난이라도 해야지."
장독대 주변을 휘둘러 보니 사금파리 조각이 몇 안된다.
"음-, 이걸 어떻한다---"
그때 문뜩 떠오르는 생각은 눈앞에 다소 낡아 보이는 조그만 간장
항아리가 보였다.
설마, 이리 낡고 더러운데 쓰지는 않겠지 싶어 옆에 있던 뾰족한
돌을 주워들고 톡톡 항아리를 건드려 보았다.
역시 낡아서 인지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이거면 그릇 대여섯개는 나오겠다"
갑자기 늘어난 사금파리 덕분에 기분은 많이 나아졌다.
담모퉁이를 둘러 늘어선 이름도 모르는 풀에서 민들레까지
종류별로 조금씩 모두 뜯어모았다.
마음이 흐뭇해진다.
마루밑으로 들어가 살림을 대충 정리하고 먹을 것도 가지런히
정리했다.
밥상이 따로 준비된게 없으니 섬돌이 밥상을 대신해야 했다.
보이지 않는 식구들을 불러 모으고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렸다.
"여-보, 밥 먹어요---"
"응, 알았어. 얌냠"
"어머, 복돌아 너도 빨리 먹어야지!"
심심찮던 차에 놀러 나갔던 털복숭이 복돌이가 고개를 삐죽 내밀고
하는냥을 지켜보고 있던지라, 난데없이 붙잡혀 아기가 되었다.
"세상에-, 내가 못- 살아---"
끼니때가 지난 줄도 모르고 일을 하다, 배꼽시계의 울부짖음에
집안으로 들어서던 두 노인네는 기겁을 했다.
대문앞에서 바로 보이는 장독대에서 부터 조각난 사금파리 조각이
마루밑 섬돌까지 흩어져 있고, 온통 흙범벅이 되어버린 신발들과
섬돌위에 어지러이 놓여져 있는 온갖 잡풀들이 머릿끝까지 심기를
건드렸다.
"에-그, 이 웬수덩어리!"
치받치는 화를 억누를수 없어, 나뭇가지를 찾는 할머니를 한팔로
막아내며, 할아버지는 어린것을 다른 한팔에 의자하여 뒤로
숨기기 바쁘다.
"모리고 한 짓인데, 좀 참아라"
"다섯살이면 잘못인지 아닌지 알 나이는 된다, 저리 비키소"
할머니는 분을 못이겨 기어이 매를 휘두르려 하지만 결사적으로
막아내는 할아버지의 힘을 이겨내진 못했다.
"어린 것이 얼매나 심심하면 그랬겠나, 자네가 참아라"
"저것이 내 염장 지를려고 이런다"
멀쩡한 항아리를 깼으니 잘못인 줄은 알지만, 새것도 아닌데
그중에서 제일 먼지끼고 더러워 못쓰겠다 싶은 것을 깼는데,
왜 저렇게 까지 화를 내나 싶어 오히려 속이 상한다.
"분명, 내가 미우니까 저럴거야"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서러움이 몰려들어 역성드는 할아버지의
한다리를 꼭 끌어앉고 엉엉 서러움을 쏟아낸다.
"괜찮다! 이 할아버지가 못 때리게 할팅게 걱정마라"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한참을 이어진 뒤에야 거무틔틔한 보리밥
한숟가락을 목에 넘길수 있었다.
"뭣 잘한게 있다고 밥을 먹이오, 굶겨야재"
미운 마음에 할머니는 밥상위에 손녀의 밥그릇은 올려놓지
않았다.
나이먹은 사람이 맘을 그리 써서 어쩌냐며 할아버지는 국그릇에
밥을 옮겨 담아 손녀에게 먹였다.
"역시, 내 편은 할아버지 뿐이야"
할머니의 눈을 피해 할어버지를 방패삼아 겨우겨우 밥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