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당시만 해도 태어난지 며칠이내 죽어가는 애들이 다반사였었다
해도 배아파 낳은 새끼가 고작 3.4일만에 눈을 감으니 그때 엄마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방한구석에 포대기로 애길 싸놓고 아버지가 와야 뭏든지 한다며
아무도 못 건드리게 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진 외가에 도착했고, 싸늘한 포대기만 한귀퉁이에
있었다.
가슴은 아프지만 어쩌겠는가 죽은 자식은 보내야 하는데...
하지만 아버진 캄캄한 밤에 도착하셨고.. 그래서 다음날로 날을 잡았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비는 왜 그리 아침부터 많이 내리는지 어쩔 수 없이
하루더 연장을 해서 한 귀퉁이의 포대긴 그렇게 며칠을 있었었다.
다음날 아침...
무섭다고 해야 할지, 아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야 할지, 포대기가
움찔했고 엄마와 아버지의 반응은 상반되었다.
엄마는 눈물까지 흘리며 기적이라고 기뻐했지만 아버진 아니었다.
얼떨떨하다 못해 죽음까지 갔던 자식을 다시 본다는 데에 찜찜해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세월이 모든게 약이니 그냥 지나쳤었다.
대구로 다시 올라온후 아버진 다시 가게에서 장살 하셨고 엄마는
애 키우는 재미에 하루가 바쁘게 지나갔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60년대 중반) 절에선 곧잘 동네에 쌀시주를 하러
다녔었고 우리엄만 어릴 때 부터 베푸는 걸 잘했었다며 커가는 우리
에게 늘 노래하셨듯이 스님들이 목탁을 대문밖에서 두드릴때마다
날름날름 쌀 한댓박씩 줬다고 했었다.
그때 자기가 무슨 영험한 도사라도 된 듯한 어떤 땡중이 엄마에게
울 큰언니를 보면서 혀를 찼었단다.
무슨 '전설따라 삼천리'도 아니구... 당연히 엄만 기분이 이상해서
왜 그런지 물었었고 얘기하는 중에 어릴적 죽다 살아온 얘기까지
줄줄이 줄줄이 까발리셨었다.
그 땡중 하는 말인즉,
'야는 지가 살든가, 아님 지애비가 죽든가 할깁니더'이런 얘길
내 동생입을 통해 들었을 때 오싹하고 소름이 돋히면서 난 잠시나마
엄말 원망했었다.
왜 이런 무서운 얘길 입에 혀같은 동생한테 했었는지, 그 와중에
내 머리속엔 왜 엄만 그런 땡중의 얘길 그냥 무심히 지나쳤는지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얘기마냥 난 땡중의 말을 찰떡같이
믿으면서 그 말을 가볍게 여겨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었다.
큰언니가 이런 이야기도 모르지만 만일에 알고 그때의 내 심정이
그랬단 걸 알았음 얼마나 가슴에 커다란 한이 맺혔을까 생각하면
정말 미안한 일이고 안된 일이지만 난 뭣보다 아버지가 먼저였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아니다 우리 엄만 무슨 큰얘기거릿냥 아버지
퇴근해 오시자마자 별 희안한 땡중 봤다며 낮에 있었던 택도 안된
얘기라며 아버지에게 했을거고, 그걸 전해 들은 아버진 더욱
큰언니에 대해서 시큰둥 해졌다.
그때부터 였을 것이다.
아버진 큰언닐 은근히 무서워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버지 근처엔 오지도 못하게 하고, 그다음인 작은언니와 난 끔찍히 이뻐하시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셨었지만 막내또한 아버지의 큰 사랑은 받지 못했었다. 단지 큰언니를 닮았단 그 이유만으로...
당신 병을 알고난 처음에도 아버진 제일먼저 큰언닐 생각했었고,
그 땡중의 말도 떠올렸었다.
그렇게 수술을 하시고 100%완쾌란 의사의 진단을 받고 퇴원했는데도
아버진 아니었다. 항상 가슴속에 커다란 불안을 갖고서 내가 언젠가
저거 때문에 죽을 거라는 자기암시를 품에 안고 사셨으니 말이다.
그래서 였을까...몇년도 안되 병은 재발했고 병원에선 이상하다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진 처음부터 죽음을 받아들이셨고, 삶에 대한 강한 애착도 전혀
보여주시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진 돌아가셨고 큰언니 아버지의 미움에서 해방되었지만
큰언닌 아버질 그리워하고 있었단 걸 훗날 몰래 읽어본 큰언니의
일기장을 통해서 알게 되었었다. 불쌍한 우리 큰언니...
큰언닌 정말 박복했던 것 같다.
난 초등학교때 까지만 해도 커서 뭐될래 하면 '우리 큰언니요'할
만큼 큰언닐 맹목적으로 따랐었다.
큰언닌 그때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헤은이'만큼이나 이뻤으며
그리고 착했고, 그러면서도 밝은 언니였기 때문이었으니깐..
큰언니가 변하기 시작한 건 대구에 와서 가족들과 같이 살기 시작
하면서 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