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병마에 시달리는 환자를 일차적으로 책임지고 간호하고 지켜봐야 하는 보호자의 고통을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것 같다.
"돌아가실 거면 편안히 빨리 눈 감으시는 편이 나은데..."하며 혼자 말로 중얼거릴 때마다 남편은 여지없이 나를 매정한 사람인 양 나무랐다.
"회복하셔서 좋아하는 아들하고 건강하게 사셔야지. 당신은 왜 그런 소리를 해?"
여러가지 걱정으로 아침에 일어나기가 겁나던 지난 8개월간의 엄마의 긴 병마와의 싸움을 그저 옆에서 지켜보면 되는 사람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가 보다.
내가 서울에 올라오고 열흘이 넘은 어느 날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부터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의사가 기도를 뚫자고 하는데 어짜피 돌아가실 거면 폐에 낀 관도 보기 싫은데 하지 말자고 말씀드렸더니 식구들에게 연락하라고 했다며 서두르지는 말고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같은 서울도 아닌 제주도를 비행기를 타고 오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아서 다시 물었다.
"꼭 내려가야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
"왔으면 좋겠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렸다는데 그 날밤을 넘기기 힘들다는 엄마가 2주째 마지막 길을 가시지 못하고 힘든 싸움을 하고 계신데 오빤들 확실한 대답을 할 수는 없었을 게다. 남자는 마흔이 넘으면 기가 빠지고 여자에게 의지한다는데 전화를 할 사람이라고는 그래도 나뿐이었으니 오빠 또한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었다.
아이를 시누이에게 맡기고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면회시간을 기다려 엄마를 보았는데 손발이 지난 번보다 심하게퉁퉁 붓고 차가왔다. 눈도 반사적으로 뜨시는 것 같았고 의식은 물론 없었다. 오빠말로는 심장은 그래도 튼튼하셨는지 다른 기관에 비해 굉장히 규칙적으로 띠었었는데 어제부터는 많이 나빠졌다고 했다. 아마도 몸 속으로 들어가는 포도당과 약으로 버티고 계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엄마의 차디 찬 손을 만지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죽기 전에 좋은 영과 나쁜 영의 마지막 싸움이 있다는데 하나님 편안하고 좋은 곳으로 엄마의 영혼을 데리고 가 주세요. 이제는 그만 좋은 곳으로 인도해 주세요."
나는 듣지도 못하는 엄마에게 약속을 했다.
"엄마! 오빠 때문에 눈 못 감는거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오빠 도와줄께. 이제 그만 편안히 눈 감아라. 이 세상에 한이 많아도 이제는 그만 눈 감고 편안한 곳으로 가."
지난 번 이모와 이모부까지 다 오셨다가 다시 올라가시는 일이 있었던지라 오빠와 나는 쉽사리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그 날밤이 지나고 또 하루밤이 지났다.
"며칠 있으면 오빠 생일인데 오빠 미역국이라도 끓여주라고 나 불렀나 보다. 엄마가."
"나는 오늘 돌아가시려나 했다. 엄마가 자기는 비오는 날이 좋다고 해서 오늘같이 비오는 날 가려고 기다리시는가 싶어서."
다음 날 오전 면회를 마치고 오빠의 원룸에 돌아와서 냉장고에 있는것으로 대충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는데 병원에서 간호사에게 전화가 왔다.
"빨리 오세요. 할머니가 얼마 안 남으신 것 같아요."
오빠는 가능한 한 빨리 차를 몰았다. 급하게 중환자실에 들어가니 아직 엄마는 그래도 숨을 쉬고 계셨다. 한 10분쯤 지나서 간호사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의사선생님은 최종적으로 엄마의 죽음을 알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없는 듯 싶었다. 이주일간을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로 약물에 의존해 목숨을 유지하고 계실 때나 돌아가셨다는 그 순간이나 우리가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죽음앞에 둔 긴 고통의 시간을 아셨나 보다. 먹어야 된다며 평상시의 두세배를 드신 그 마지막 아침식사가 저 세상에 가시기까지 버티기 위한 마지막 식량이었나 보다.
병원 장례식장의 빈소를 식구들이 도착할 때까지 오빠와 둘이서 지키며 나는 엉뚱하게도 무남독녀인 정은이를 떠올렸다.
'나중에 정은이가 시집도 안 가서 남편이나 내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되면 혼자서 외롭게 이런 자리에 서 있겠구나 그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