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겨울방학 중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학기중간이라면 더 힘들었을 것 같았다. 엄마는 간간히 눈을 뜨셨고 형광등 불빛이 흐리다며 "뭐 이러니? 불이 왜 이래."하시면서도 정신은 맑으셨다.
"엄마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병어회 좀 사올까?"
"그러던지."
엄마는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게 말씀하시는 듯 때??로 중얼거리셨다.
"엄마! 죽이던지 살리던지 빨리 좀 ..."
돌아가시기 전에 침대위에서 몸만 옆으로 뉘인채 병어회를 맛있게 드시던 모습이 생각나서 오빠와 나는 엄마에게 빨리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 오빠 차를 타고 서둘러 나갔다. 병어회가 없어서 광어회가 그래도 환자 먹기에 부드러울 듯 싶어 한 접시 떠가지고 내가 먼저 방문을 열고 엄마를 불렀는데 조용했다.
"엄마! 엄마!" 나는 급히 달려나갔다.
"오빠! 빨리와 봐. 엄마가 이상해."
오빠는 엄마의 숨소리를 들어보고 얼굴을 살피더니 아무래도 일을 치루게 될 것 같다고 하면서 조금 지켜보다가 병원으로 옮기자고 했다. 엄마는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마디의 말도 눈조차도 뜨지 않은 채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오빠가 엄마를 등에 업고 차 뒷자리에 태우고 내가 엄마를 무릎에 눕히고 우리는 오빠가 미리 알아 둔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의사 말로는 그날 밤 아니 조금 시간을 끄시더라도 그 다음날을 넘기기 힘들거라며 병원에 있으려면 인공호흡기를 끼고 중환자실로 가던지 아니면 모시고 나가라고 했다.
중환자실로 엄마를 옮기고 나서 서울에 계신 이모와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남편은 그 다음날 중요한 출장이 있어서 일 당하면 전화걸테니 그 때 오라고 했다.
이모와 이모부가 그 다음날 아침 병원에 오셨다. 남동생도 연수중인데 휴가를 얻어 오후에 내려왔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끼고 어렵게 숨을 이어가는 엄마를 지켜보면서 10년전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떠 올렸다.
중풍으로 몸 한쪽이 불편하신 것도 부족해 돌아가시기 1년 전 직장암이 생기셨는데 수술을 하신 지 일년만에 다시 재발하셨다. 직장부근을 잘라내고 관을 달고 사시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것 같아 아버지 본인도 가족들도 수술을 거부했다. 하루하루 몸이 사그라져가는 아빠를 보면서 참 마음이 많이 아팠었다.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께 달려서 그저 우리는 기다릴 뿐 마지막 가시는 아버지옆에서 무기력했다.
돌아가시던 마지막 구정에 식구들의 사진을 찍어주던 우리 남편은 카레라 렌즈를 통해 잡힌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눈물을 떨구었다.
"이제 마지막 사진일거라는 표정이 얼마나 역력하시던지 ..."
남편이 내게 나중에 해 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