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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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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BY fragrance 2003-02-22


큰 올케가 오빠의 짐을 실어보낸 모양이다. 좁은 베란다 뒤쪽에 오빠의 옷가지 등이 든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부부가 같이 살아내기도 힘들지만 일단 결심하면 헤어지는 것도 이렇게 순식간인가 싶었다. 하긴 서울과 제주도로 떨어져 살아서 못들어서 다행이었지 밑바닥으로 추락해버린 그들 부부의 생활이 얼마나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을까 싶었다. '쌓이고 쌓인 것이었겠지. 엄마일은 아마도 도화선이었을테고...' 누군가가 말했었다. 결혼을 할 때는 항상 이혼할 각오가 있어야 할 수 있다고. 그 와중에도 오빠는 벽면에 싼 가격에 책꽂이를 짜 넣고 책을 정리해 두었다. 사람일은 참 모를 일이다. 고등학교 예비고사를 보러가던 날 오빠의 가방에서 몸에 꼭 맞게 줄인 바지와 흰구두를 발견하고는 아버지가 시험보는 학교문에서 지키고 계시다가 오빠를 데려온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 저렇게 오빠가 학구적이고 책을 아끼는 사람이 되었을까 의아했다.
하긴 돈이 없어서 내가 공부하기가 힘들어졌을 때에야 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게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돈걱정만 없고 몸이 가족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 편한 일이 공부하는 것이겠구나 싶었던 적이 많았었다. 그건 혼자 하는 일이니까. 인간관계 등에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혼자서 책임지면 그 뿐이니까.
그 다음날 비행기표를 예약한데다가 이제 미국갈 날도 얼마남지 않았는데 그 동안 엄마때문에 다 뒤로 미룬 상태여서 나는 마음이 바빴다. 엄마가 간신히 두유라도 마시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빠지고 늘어지기 시작하는데 오빠가 그래도 냉장고와 세탁기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며 같이 사러나가자고 나를 재촉했다. 엄마의 병원비를 계산하고 남은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이제 오빠와 엄마가 살아갈 최소한의 것들을 장만해야만 했다. 나가는 우리를 보며 엄마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빨리 들어와라 불안하다."
오빠가 이혼했다는 소리를 들은 엄마는 이모보고 속이 타니 포도주 한 잔만 갖다 달라고 하셨단다. 이모는 엄마가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시장에 채소사러 가면 엄마하고 아들하고 둘이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렇게 그게 부럽더라."
엄마는 이 나이 먹도록 몰랐나 보다. 남편이 있어도 자식이 옆에 있어도 자기 자신의 삶의 몫은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걸 말이다. 결혼해서 남편이 옆에 있다고 해서 자식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내 아픔을 내 외로움을 대신해 줄수도 없다는 것을 엄마는 그 때까지도 몰랐나 보다.
서둘러 텔레비젼과 냉장고와 세탁기를 사고 근처의 이-마트에 들러 장조림할 고기며 밑반찬 만들 거리를 샀다. 오빠는 엄마가 먹을 걸 걱정했는데 무엇을 해 드려도 많이 드시지 못하리라는 걸 아는 나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룸으로 돌아와서 나는 잠시도 쉴 수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오느랴고 힘들어서 엄마가 입었던 옷에는 폐에서 흘러나온 액이 범벅이었고 세탁기가 아직 배달되지 않았으니 손빨래를 해야만 했다. 국 끓여 놓고 장조림 만들고 살림살이 정리하고 엄마 옷 상장에서 당장 입을 것 빼내어 옷장에 넣고 밤 늦게야 잠이 들었다. 그래도 우리 오빠는 살림꾼이다. 언제 사들였는지 왠만한 양념이며 자잘구레한 살림도구는 다 있었다. 규모는 적었지만 다 새 것이어서 우리집 살림보다 나아 보였다.
'이 두사람을 놓고 나는 내일 서울로 가야 하는구나.'
가슴이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날 공항으로 떠나면서 나는 엄마와 아마도 미국 가기 전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인사를 나누었다.
"엄마1 오빠 속썩이지 말고 잘 먹고 잘 있어. 힘들어도 자꾸 몸 움직이고. 나 미국갔다 올 때까지 몸 나아서 잘 지내."
뜻 밖이었다. 엄마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은.
"그 때까지 내가 살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엄마 잘 못 만나서 하나밖에 없는 딸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엄마에게 듣는 미안하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왜 그래 갑자기. 엄만 오래살거야."
나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누가 보든지 말든지 나는 계속 눈물을 닦아냈다.
서울에 돌아와서는 계속 바빴다. 여기저기 부동산에 다니면서 급하게 전세내놓고 짐싸고 미국갈 때 가져가야 되는 것들 쇼핑하고 돈 받고 다 마치지 못한 아이들 공부봐 주는 아르바이트도 해야했다.비행기값이며 오고 가며 쓴 돈들을 남편에게 손벌리기도 말하기도 싫었다.
'이건 내 친정일이니까.'
그러던 어느날 이주쯤 되었을까 새벽 다섯시쯤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