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가 입원한 병원에 다니면서 아무 생각없이 앉아 있노라면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부터 기울기 시작한 아니 어쩌면 그 때까지 내가 살면서 한번도 상상해 보지도 못했던 곳으로 온 식구들이 추락하던 때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봄냄새 가득하던 5월 어느날 대학교 신입생인 남동생이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자 아버지는 늦게까지 잠을 안자고 기다리시다가 온식구가 다 깰 정도로 심하게 야단을 치셨다.
이미 그 때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외에 손을 대신 목장이 속을 썩이고 있었던 것을 어렴풋이 집안사정 돌아가는 걸로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그 날 밤 아버지의 입을 통해 사실을 확인함 셈이었다.
"요즘 나는 사업과 목장일로 골치가 아파 잠도 제대로 오지 않는데 아들이라는 자식이 공부는 안하고 매일 늦게 돌아다니니..."
방안에서 들리는 소리로 짐작컨대 아버지는 동생을 가죽벨트로 몇대 내려치신 모양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평상시에는 그렇게 조용하신 분이 아들들을 야단칠 때면 가끔가다 가죽벨트로 내려치시곤 하니 말이다.
아버지는 유독 아들들에게는 짜신 분이었다.
"옛날 내가 어렸을 때는 몇십리길을 걸어 학교에 다니고 책받침 하나를 몇년씩 썼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아까운 게 없어."
어떤 때에는 대학교에 간 오빠에게 용돈청구서를 쓰게 하셨다. 몰론 명확한 용도를 밝혀야 했다.
우리가 아버지가 옷도 잘 안 사시고 남들이 흔히 하는 해외여행 한 번 제대로 하시지 않는 것을 보면서 중얼댈 때마다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뚜렷이 생각난다.
"너희는 돈 버는 아버지 만나 쓰고 싶은 것 다 쓸 수 있지만 아버지는 돈주는 부모가 없어 아껴야 해."
이제 나이 마흔이 되어 딸 자식 하나를 키우면서도 돈을 쓸 때마다 이리저리 계산을 하는 내모습을 보며 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 어디에도 날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 믿을 것은 내자신뿐이라는 것을 대학졸업하던 때부터 알 수 밖에 없었던 내 현실이 인색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를 마음 깊은 곳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일까?
나는 지금도 동생을 야단치신 후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않고 누군가가 목장을 사겠다고 했다며 새벽에 목장에 가셨다가 말한마디 못하시는 상태로 강원도 철원의 어느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집으로 실려오신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가슴 한 켠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집으로 왕진하는 한의사분의 침을 맞으셨는데 다행인지 조금씩 몸이 풀리기 시작하셨다. 아버지의 병명은 뇌졸증 말하자면 한 쪽으로 온 중풍이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던 3일에 일어나지 못하면 3달, 3달에 일어나지 못하면 3년, 3년에도 일어나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라는 병을 아버지는 갖게 되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쓰러지신 후 우리는 아버지의 사업과 목장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나쁜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그 다음부터 우리가족에게는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나 심했다. 소위 말하는 빚잔치를 해야했다. 살고 있던 강남의 50평짜리 아파트를 싼 값에 팔아야 했고 강원도의 목장도 아버지에게 사채를 주었던 친구분들의 손을 거쳐 싼 값에 팔았다.
아버지 친구분들을 따라 목장 파는 일에 다녀온 오빠는 정말이지 벙찐 모습으로 돌아왔었다.
아버지 친구분 두분은 목장 판 돈을 받자마자 양말속에 자기가 빌려준 원금과 그 달 이자까지 합쳐 양말속에 넣었다고 했다. 목장을 시작할 때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고 나니 정작 우리 손에 떨어진 돈은 지금 기억으로 천원만원 돈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오빠는 넋나간 모양으로 일을 끝내고 먹은 점심값까지 자기가 냈다고 했다.
'돈 앞에서 사람은 그렇게 얼굴을 바꿀 수 있구나.'
'우리 아버지는 절대 남의 돈을 떼먹을 사람이 아닌데 ...'
아버지는 평상시 다른 사람에게 밥사시는 일을 좋아하셨고 똑똑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젊은 사람들을 좋아하셨다. 엄마는 늘 그게 불만이었다. 가족들에게는 인색하면서 남에게만 잘 한다면서.
아버지의 후한 인심덕이었는지 우리는 그다지 큰 다툼없이 70%정도 갚는 선에서 빚잔치를 하고 그 때는 채 개발되지 않았던 강남에서도 한참 변두리인 곳에 전세집을 얻어 이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