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평안히 죽고 싶다]
해가 지고 어둠이 휘장처럼 드리워졌다.
흐르는 강물을 공허하게 응시하며 영이 말했을 때 내 가슴엔 찬바람이 한줄기 쏴아 하고 지나갔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영은 지쳐 있었다. 판도라의 마지막 희망마져 다 써버린 듯 영은 빈 껍데기로 웃었다.
언제나 씩씩하던 나의 영이 바람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생명이 다한 듯 영의 웃음은 메마르고 어두웠다.
무슨 말을 해 줄 것인가... 눈물만이 흘렀다.
[야,얼음공주 너 울 줄도 아냐? 그러지마라 너마져 그러면 난 어떡하라구...난 괜찮아...괜찮구 말구...]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영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인어공주처럼 보였다.
그 날이 지나고 영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나에게는 물론이고 집에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여행을 떠난다고 했단다.
난 소름끼치는 두려움속에서 가장 최악을 떠올렸다. 일이 손에 잡힐리 만무했다. 실수가 잦았다.
태민을 찾았다. 처음으로 영의 지지리도 복없는 남자들 얘기를 털어 놓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조만간 내가 돌아 버릴 것만 같았기에...
담배를 피우는 태민의 표정이 무겁고 심각했다.
[왜인지...상우 녀석 탓인 것 같다]
나는 정정하지 않았다. 영의 아버지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영의 마지막 자존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영의 원초적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이 아버지에게 한번만 기회를 준다면...
그러나 부녀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마주 보고 선 사이가 되어 있었다.
[처음 상처가 너무 깊어 남자 보는 안목이 흐려졌을거야]
태민의 말에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나는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태민을 찾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태민은 늘 기꺼이 나를 만나 주었다.
수시로 나는 영의 집에 전화를 넣었다. 연락이 없다고 하는 엄마의 음성은 애처로웠다. 나는 번번이 위로의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가 내리던 날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영이었다. 반갑고 떨리는 마음으로 열었으나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잘 있으니 걱정말라는 말 뿐이었다.
난 영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나에게조차 연락처를 남기지 않는 영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태민은 영에게 시간을 주라고 했다. 영이 스스로 견뎌내야 하고 이겨내야 한다고...영이 자신을 시험 할 좋은 기회라고...
수긍은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라는 게 너무 길었다. 한달 두달이 흐르고 1년이 훌쩍 지나갔지만 영에게는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4년이 흐른 어느 날 영이 전화를 했다.여전히 밝고 씩씩한 목소리에 나는 놀랍고 반갑고 서운하고 아울러 미안했다.
잊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영을 마음 속 비밀의 방으로 조금씩 밀어 넣었고 급기야는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과히 옛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영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영의 옆에 남자가 있었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여자 같았다.
[결혼 할 사람이다...한달 후에...당연히 올거지?]
번개에 맞아도 이보다 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을 잊고 있는 내게 남자가 수줍은 듯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남자가 수줍음이라니...!
거기다...!
외모로 사람의 전부를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남자는 영의 타입이 아니었다. 몸매는 넙대대하고 얼굴은 납작 그 자체고 머리는 대머리의 징조를 띄고 있었다.
남자에게서 악의 같은 건 느낄 수 없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생기가 없고 어두었다. 차라리 여자라면 봐줄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앉아만 있는 모습 또한 무능해 보이기까지 했다.
영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속이 울컥 했으나 ...
그 기분을 나는 태민에게 퍼부었다. 술잔을 기울이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났던지...태민은 그저 웃기만 했다.
태민과 내 관계가 묘하게 변했다. 아니 내가 변한 것이다. 만남이 길어지는 동안 태민의 한결같은 우정에 나는 어느순간부터 태민을 남자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태민이 나를 좋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나는 자신도 확신도 없었다. 다른 여자가 있는지 있었는지에 관해서도 묻지 못했다.
내가 태민에게 친구 이상으로 다가오지 말라고 한 말이 계속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그 말을 번복할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태민을 향한 가슴앓이를 하면서 위는 함께 영의 결혼식장에 갔다.
아름다웠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 가면서 영은 울었다.
지나온 날들에 대한 마지막 이별의 선물이겠지...
아픔일거야...
후회일지도 모르지...
나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돌아서 오는 내내 눈물이 났다. 내가 영을 위해 울 수 있는 마지막 눈물이기를 빌었다. 태민이 커피를 마시잔다.
커피잔을 비울동안 태민은 말이 없었다. 내 마음을 헤아린 베려하고 생각했는데...
[부모님이...내 앞으로 아파트를 사 주셨어 ]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싶었다.
[자리도 잡았고...나이도 서른을 넘었고...부모님이 걱정하신다 그래서 말인데...나 결혼 할까 해]
나는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걸 처음 경험했다. 충격은 두말 할 것도 없었고 눈앞이 아찔했다.
결...혼? 태민이가? 태...태민이가...결...혼을?
[그래서 말인데...나하고 결혼할래?]
태민이 내게 프로포즈를 한 석달 후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영은 결혼 1년도 안되서 첫 딸을 낳았다.
아이구...생각보다 기네요
끝낼려고 했는데...
다음에는 진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