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모든일이 내 뜻대로 움직여준다면야...그러나 언제나 뜻하지 않는 곳에서 뜻하지 않게 뒤통수를 맞는 건 영이었다.
과연 그랬다. 아버지의 외도로 모든게 어긋나기 시작한 그때부터 영에게 제대로 된 일이 찾아 온 적이 없었다. 늘 교묘하게 영을 비켜갔다. 이것이구나. 싶으면 비웃기라도 하듯 영을 모질게도 등지고 지나가는 게 행운이라는 것이었다.
세호는 그 여자와 헤어진 게 아니었다.
해가 바뀌고 그 해 겨울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다. 그리고 따스했다. 그 날도 아침부터 하얀 백설같은 눈이 쌓여 있고 또 나풀거리듯 내리고 있었다. 모처럼의 단잠을 깨운 건 영이었다. 세호에게 가자는 것이었다. 싫다고 버티는 나를 반 어거지로 일으켜 세웠다. 영의 손에는 과일이며 반찬거리가 들려서 있었다. 둘만의 은밀한 파티에 미운 오리새끼마냥 끼여든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나를 찝찝하게 만들었다.
나의 씩씩한 영은 행복한 발걸음으로 주택이 즐비한 골목길을 돌아 두번짼가 세번짼가 하는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세호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픈 계획으로 영의 얼굴은 장난기와 즐거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층으로 주저없이 올라간 영은 벨을 눌렀다. 얼마지나지 않아 빼꼼이 문이 열리는가 싶었는데 영이 확 잡아 채 열어 젖혔다. 그런데 정작 영과 나보다 더 놀란 건 안에서 엉거주춤 손을 내밀고 있던 여자였다. 굽슬굽슬한 파마머리에 오동통한 몸매를 한 다소 촌스런 여자가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어...]
영은 잘못 온게 아닌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확인을 하고는 여자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영의 몸 전체를 흐르는 긴장감과 다소의 두려움을 감지하고는 덜컥 겁이 났다.
[누구시죠]
여자는 호기심어린 말투로 물었다.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는 영의 몸에서 작은 떨림이 전해져 왔다. 나도 영도 그 여자가 누군지 대충 감을 잡고 있었다.
그 때 세호가 무슨일이냐며 모습을 드러냈다. 샤워를 했는지 수건으로 머리를 훔치며 나타난 세호와 여자의 자다 깬 듯한 홍조 머금은 부시시한 모습.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서 내가 그릴 수 있었던 건 밤새도록 엉켜있는 남녀의 모습이었다. 섹스를 해 본 적이 없는 내가 느꼈다면 영은 오죽하겠는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얼굴의 영을 발견한 세호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뭐라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여,여길...어떻게...]
더듬기까지 하는 세호였다.
[이 여자가 그 여자야?]
생각외로 차분한 음성으로 영이 묻자 세호는 선뜻 답을 하지 않았다.
[이 여자 여기서 잤어?]
벌겋게 된 얼굴로 세호는 영의 눈을 피했고 여자는 모욕적이라는 듯 매서운 눈으로 영과 나를 노려보며 세호의 팔을 움켜잡았다.
영은 그들을 밀치고 안방으로 들어 갔다. 방안은 달콤한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음을 방안은 말해 주고 있었다. 영이 주먹을 쥐었다. 숨소리도 거칠었다. 눈에는 이제 배신의 아픔보다 인간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
[이 기집애가 찰거머리마냥 따라 다닌다는 그 기집애는 아니겠지?]
영이 비아냥댔다.
[세호씨 이 여자 누구예요?]
[누구긴! 세호씨랑 결혼 약속한 여자다 어쩔래!]
영은 여자를 금방이라도 후려칠 듯한 목소리로 대신 답했다. 여자는 무슨 자다 봉창 두들기는 소리냐는 듯 세호를 쳐다보았다.
세호의 말은 거짓이었다. 애초부터 세호는 그 여자에게 헤어지자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 여자는 같은 동네에서 자라 애인으로 발전한 사이란다. 양가 집안에선 이미 혼인한거나 마찬가지로 알고 있단다. 시골 읍사무소에 근무하는 여자는 가끔 올라와 세호의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밑반찬을 만들어주며 섹스 상대까지 해 주는 여자란다. 그 관계가 벌써 10년을 이어오고 있단다. 여자에게 있어 세호는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남자고 낭군이었다. 하지만 세호는 여자에게 싫증을 느끼고 있는 상태지만 집안 어른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단다. 그리고 자신만을 바라보며 이미 두번이나 자신의 분신을 지워야 했던 여자에 대한 안쓰런 정때문이라도 모질게 헤어지지 못하고 있단다. 세호는 영을 사랑한다고 했다.
여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연민의 감정이 생겨났다. 세호는 담배에 불을 당겼다. 영이 빼앗아 입에 물었다. 내가 놀랐다. 영이 상우와 헤어졌을 때 호기심으로 나와 함께 담배를 피운 적이 있었지만 그 후로 영이 담배를 피운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횡설수설하면서 여자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영은 아무런 감정없는 시선으로 여자를 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두 여자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단 말이지...]
그건 영에게 되풀이 되는 악몽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다시금 싹트는 일이고 잠잠하던 가슴에 불씨를 당기는 일이었다.
[이 여자도 버릴 수 없고 나도 버릴 수 없단 말이지...사랑도 하고 싶고 그렇다고 정도 떼어낼 수 없고...웃기고 자빠졌네]
영은 공허하게 독백처럼 허허롭게 내뱉았다. 쓴웃음이 담배 연기와 함께 세어 나왔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어떡할래?]
그러자 여자가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정작 통곡하고픈 사람은 영이었다. 나는 영의 가슴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았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기분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아]
섬짓한 소리에 내가 소리쳤다. 더 앉아 있다간 영의 성격에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 싶어 나는 얼른 영을 일으켜세웠다.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냉정하게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지지리도 복도 없는 년이지...하긴 아빠 복 없는 년이 남자 복이 있을라구...옛 말 그런 거 하나도 없네 부모 복 없음 남편 복 없고 자식 복 없다구...]
영은 미친 년처럼 웃기 시작했다. 내버려 두었다. 내가 무얼 하겠는가. 이제는 내가 지쳐가고 있었다. 영의 팔짜에 내가 무너지고 있었다.
영업시간이 끝날때까지 디스코텍에 앉아 있었다. 음악도 귀에 들어 오지 않았고 콜라도 그대로였다. 영과 나는 말이 없었다. 그 늦은 밤에 영과 나는 갈 곳을 찾아 음악 감상실로 들어 갔다. 영이 음악을 신청했다.
바바라 스트라이잰드의 woman in love
life is a momant in space
when the dream is gone
it's a lonelier place
i kiss the morning good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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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에게 딱 어울리는 곡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 소리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데 나는 훔치지도 않고 내버려 두었다. 여전히 영과 나는 말이 없었다. 음악실에서 영과 나는 밤을 하얗게 비우고 있었다.
어둠이 다하면 새벽이 온다.
분홍빛 새벽이 온다고 했던가...
결근을 하지 않는 내가 회사에 적당한 핑계를 대고 하루를 얻었다. 영은 나란 존재가 옆에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일 헤매고 다녔다. 공원에서 몇 시간 커피숍에서 몇 시간 영화관에서 서너시간 백화점에서 또 몇 시간...먹지도 않고 영은 정처없이 걸었고 나 또한 그림자되어 따라 붙었다.
[이제는...평온하게 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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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재미없는 글 지겹게도 길지요?
아주 오래된 친구의 친구 얘기에 조금 살을 덧붙혀 써 봤습니다
다음에 끝낼게요
읽어 주신 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