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688

[제10회]


BY khl7137 2002-12-17


잊고 있었던 태민이가 제대를 했다. 제법 자란 까실한 머리와 갈색톤의 피부를 하고 태민이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이상하게 죄지은 기분이었다. 마치 바람피다 들킨 마누라처럼 말이다. 그리고 또 이상한 건 태민을 봤을 때 가슴이 설레었다는 것이다. 마치 오랜 연인을 해후한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난 태민에게 냉정했다.

올해가 지나면 태민은 캠프스로 돌아가지만 난 내년이면 졸업을 한다. 파란만장한 대학 시절과 파릇한 신입생들 사이를 오가다 보면 나란 존재를 잊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자 태민을 향한 유리벽이 자연스레 쌓아졌다.

영이 내 집앞을 안방인냥 점령하고 있은 지도 한달이 훌쩍 지났다. 영을 볼때마다 나는 울컥하는 감정과 미워할 수 없는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다 돌아서곤 했다. 편할 날이 없었다. 영이 전해 주고 간 편지가 고스란히 서랍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뜯을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되면 난 영을 다시 사랑할게 될 것이란 걸 나 스스로가 알고 있었기에...칼날같은 내 성격도 영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니 영에게는 알수없는 매력이 있었다. 감히, 쉽게 등을 돌릴 수 없게 만드는 끈적한 기운. 나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았고 다친 자존심을 회복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배신의 잔은 독약보다 강하다.

선배를 정말 사랑했다면...어쩌면 다시는 영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선배에 대한 미련은 한 점 티없이 말끔이 사그라 들었다. 나는 일종의 시위같은 마음으로 영의 행동을 내버려 두고 있었다. 영의 성격상 내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죽을때까지 그렇게 하고도 남을 것이란 걸 잘 알면서도...

일주일 후 태민이 다시 나를 찾았다. 레스토랑에 갔다. 나는 커피를 시켰고 태민은 쥬스를 시켰다.
[군대 가기 전에 내가 한 말 기억해?]
[...]
[남자가 군에 가면 여자가 고무신 바꿔 신고 여자가 기다리면 남자는 군화를 차버리듯 여자를 찬다고 하더라]
[우린 애인 사이가 아니야]
[알아 내 말은 난 이렇게 무사히 니 앞에 섰다는거야 3년만에 만난 날 보고도 놀라지 않는 널 보고 난 니가 나를 조금은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 기분좋더라]
[착각은 자유야]
[나랑...만나자]
단도직입적인 태민의 말에 잠시 심장이 뛰었으나 이내 나는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누군가를 다시 만날 준비가 안된 것도 있지만 남자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 퇴색된 상태라 태민의 프로포즈에 나는 겁을 먹었다.
[미안...그런 얘기라면...!]
[기철선배 때문이니]
[...!]
[영이 편지에 썼더라]

놀라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영이 태민에게? 영이 태민까지?
사람이 너무 충격을 받으면 쓴웃음이 나온다고 했던가. 내가 그 꼴이었다.
[세상 모든 남자들이 영을 알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비웃 듯이 내가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걔 편지 받고 놀랬어 집에 전화한 모양이더라]

영은 편지에 군대 있을 때는 편지가 가장 큰 위안이라고 썼단다. 영의 편지는 태민에게 기회였다. 태민은 답장을 하면서 내 안부를 물었고 무언가를 눈치 챈 영이 편지 쓸 때마다 내 얘기를 낱낱이 고해 바치는 걸 아끼지 않았단다.

[영이 걔 죽을만큼 후회하고 있더라 자신도 왜 그랬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단다]
[너도 영이 편들고 싶니]
[아니 오히려 감사하고 싶지 걔 아니었음 넌 기철선배와 사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선배와 경쟁하기엔 그렇잖아...선배를 사랑하니]
[그렇다면 나를 그냥 내버려둘래]
태민은 나를 빤히 건너다 보았다. 진지하고 맑은 눈빛이라 당황한 나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선배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영을 용서해줘]
[니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야]
나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친구로서가 아니라면 내 옆에 오지마]
[영이 걔 너 많이 아끼더라]
돌아서는 등에 대고 태민이 말했다.

태민과 헤어져 나는 무작정 걸었다. 태민과의 짧은 대화가 내 마음을 편하게 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햇겠는가... 때론 거세게 그러다가 막힌 듯 졸졸졸... 어떨 땐 흐르다 말다...하던 마음이 호수처럼 잔잔해진 것이다. 긴 한숨이 하염없이 나왔다.

영은 어김없이 나를 찾았고 나는 어김없이 외면하고 있었다. 동생이 뭐라고 잔소리를 해댔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늦은 밤 동생이 잠들고 나자 나는 창가에 서서 영이 서 있는 곳을 한참이나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나는 편지들을 떠올렸다. 그 중에 묵직해 보이는 편지 하나를 뜯었다. 녹음테잎이 하나 들어 있었다. 편지와 함께...

진아 내 사랑하는 두번째 마누라
용서해줘
나 아무것도 못하겠어
니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하고 큰 존재인지 이제야 깨달은 바보같은 나를 용서해주라

얄궂게도 웃음이 나왔다. 테잎을 틀었다. 해리 닐슨의
<without you>
내가 좋아하는 곡이었다. 또 밤을 꼬박 샜다.

[술 마시자]
다음 날 집앞에 있는 영에게 내가 말을 했다. 영과 나는 포장마차로 향했다. 소주와 꼼장어 오뎅국물을 시켰다. 저녁전이라 우동을 먼저 먹었다. 한동안 말없이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너 두번 화나게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났겠다. 지독한 마누라 같으니... 불에도 녹지 않을 얼음덩어리야 넌]
술이 오르자 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웃었다.
[세상에서 난 니가 제일 무서워]
[차라리 선배를 달라고 하지 그랬어]
[그 딴 놈 줘도 안해 너한테 어울리지도 않아 나쁜 놈이야 상우처럼 니가 그런 놈한테 마음 줬다는 게 이해가 안돼 같이 안 잔게 얼마나 다행이야]

소주 세 병을 비우고 영과 나는 일어섰다. 찬 밤공기가 기분좋게 느껴졌다. 영과 나는 학교로 들어갔다. 노상강당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띄엄띄엄 학생들이 눈에 띄었으나 아무도 시비를 거는 이가 없었다. 영이 나를 안았다. 말하지 않아도 영과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일은 영과 나를 영원히 묶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한동안 영은 남자 만나는 일을 자제하고 한 건설회사 총무과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남자를 만났다. 과장이라는 남자다.

그리고 내 옆에는 가끔 태민이 자리하고 앉아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복학할때까지 시간이 많다는 이유로 영화관이며 커피숍이며 도서관으로 나를 끌고 다녔다. 다른 어떤 요구는 없었다.

영은 태민을 놓치지 말란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태민은 영과 같은 타입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단다. 그러나 친구로는 딱이란다.

나는 영의 애인을 만났다. 잘 생겼다. 나이가 있어서인지 느긋하고 당당해 보였다. 결혼할 것이라고 영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렇게 되길 나 또한 빌었다. 제발...이 남자가 영의 마지막 남자이길 영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줄 남자이기를...

크리스마스 이브 때 영은 태민을 데리고 나오라고 했다. 넷이서 파티를 하잔다. 아는 언니가 시내서 커피숍을 운영하는데 그 날 빌려준다고 했단다. 내가 망설이자 영은 태민이 보고 싶다는 핑계를 댔다. 승락을 했으나 개운치는 않았다.

준비는 영이 했다. 색색의 촛불에 불을 밝히고 케익과 술 음료수 과일 과자...하여튼 준비성 하나는 예전부터 알아주던 영이 아닌가.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 지나도 영의 애인은 오지 않고 있었다. 남자 이름은 세호였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내가 물었다.

[...정리 되는대로]
영의 말투가 영 불안했다. 내가 똑바로 쳐다보자 영은 씨익 웃었다.
[그 사람... 나 만나기 전에 사귀던 여자가 있었는데]
[있었는데?]

영의 말은 그 여자가 세호를 놓아주지 않고 계속 주위를 맴돈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와 동거한 일도 있단다. 하지만 그건 이미 오래전으로 영과 만나기 훨씬 전에 끝난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자가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세호를 찾아 온다는 것이다.한숨이 절로 나왔다.

[니가 만나는 남자는 왜 맨날 그 모양이야]
속상해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태민은 들어도 못 들은 척 앉아서 맥주나 마셨다. 영의 말은 나를 또다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쩐지 완벽해 보인다 싶은 남자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12시가 가까워서야 세호가 급히 들어섰다. 집에 일이 있어서란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 말이 신빙성이 없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어찌 내색을 하겠는가. 넷이서 그런대로 의미있는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또 한 해가 가고 나는 졸업을 했다. 그리고 태민은 복학을 하고 주희는 설이 지나자 결혼을 했다. 두번의 낙태 경험과 많은 남자 관계를 청산하고 주희가 선택한 남자는 괜찮은(?) 남자였다. 울산에 있는 사촌 언니의 소개로 만났는데 하는 일은 소방 공무원이요 키는 크고 집안에 재산도 빵빵하게 있는 남자란다. 요조숙녀가 되어 면사포를 쓰고 있는 주희를 보며 나는 복도 많은 년이라고 했다. 영은 남자가 주희의 과거를 모른다고 했다. 당연하지. 그 과거를 알면 어느 남자가 좋아하랴. 아니지 사랑에 눈 멀면 과거따위는 말 그대로 과거가 되겠지. 나는 같은 여자로서 주희를 이해하면서도 조금은 그 뻔뻔스러움에 속이 뒤틀렸다.

나는 영에게 세호도 영의 과거를 아느냐고 물었고 영은 아직 얘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 죽을 때까지 얘기하지 마]
내가 그랬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친구가 또 다시 상처받는 일은 없어야하지 않겠는가. 이번에는 확실히 영이 무사히 탈없이 주희처럼 면사포 쓰고 걸어 들어가길 빌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사람 사는 일이 어디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인가.모든 일이 내 마음같이 된다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