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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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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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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BY khl7137 2002-11-30


놀란 고함소리에 나는 무겁기 그지없는 눈을 애써 떠보려 했다. 동생의 목소리 같았다. 같은 게 아니라 동생이었다. 몸을 일으켜 앉아 보려 했다. 머리가 띵. 했다. 속에는 무언가가 들어앉아 있는 듯 뒤틀리고 쑤시고 난리도 아니었다. 몽롱한 상태로 영을 찾았다. 영은 한쪽에 널부러져 있었다. 내 옷도 영의 옷도 축축했다. 남은 술이 쏟아진 모양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머리속이 울려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동생의 째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지독한 냄새에 동생은 문이란 문은 다 열었다. 그리고 기가 차다는 듯 방안을 둘러 보았다. 여기저기 어질러진 술병과 담배 꽁초들, 과자 부스러기, 뒹굴뒹굴하는 과일들. 싱크대는 내가 그랬는지 영이 그랬느지 모르지만 토한 이물질로 엉망이었다. 보여서는 안될 모습을 보인 것이다. 영을 깨웠다. 나보다는 상태가 나은지 영은 동생을 알아 보았다. 영은 동생을 예쁜이라 불렀다. 맹숭맹숭 평범한 나와는 달리 동생은 미스코리아 뺨치게 얼굴이 예뻤다. 그래서 콧대가 센가?

상황을 확인한 영이 치우겠다고 하자 동생이 우리더러 나가라고 했다. 대학에 떨어지면 집에다 고자질하겠단다.

바깥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영은 해장국 하잔다. 대학가 호프집에 들러 오뎅국을 시켰다. 시험을 포기한 이유를 물었다. 공부엔 관심이 없단다. 돈을 벌어 독립하고 싶다고 했다.

난 대학에 진학했고 영은 한 중소 기업에 취직했다. 그렇다고 우리 사이가 달라진 건 없었다. 영의 아버지가 영의 대학 등록금으로 마련해 놓은 돈을 영은 고스란히 받아서 소형차를 샀다. 자유를 향한, 반항을 향한 첫 걸음을 영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그 즈음 영의 첫 번째 마누라라 불리는 주희가 대구로 올라 왔다. 나는 대학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상우의 친구 태민. 별로 반갑지 않았는데 놈이 아는 척을 했다. 태민이 영의 안부를 물어 오길래 주제넘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차갑게 내뱉고 돌아섰다.

주희로 인해 영과의 만남이 줄어 들었으나 영은 비밀이 없었다. 주희가 올라온 이유는 유부남과의 사이에서 생긴 애를 지우기 위해서라는 말을 했다. 난 섬짓했다. 그리고 불쾌했다. 영에게는 지금 그런 친구가 있어서는 안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후 영은 주희를 데리고 학교로 왔다. 주희의 얼굴에서 본 건 색기였다. 여자인 내가 봐도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데 기회를 노리는 수컷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참으로 향기 짙은 여자였다.

내가 학교 생활에 적응할 무렵 영에게 남자가 생겼다. 그 두 번째 남자를 영은 형이라 불렀다. 음악을 하는 부잣집 남자로 낚시를 즐기고 여행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남자는 늘 화가들이 즐겨 쓰는 모자를 썼다. 흔히 사람들은 그런 모자를 빵모자라 불렀다. 그를 닮아 영도 그때부터 빵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다소 들뜬 듯 보이는 영의 얼굴에는 사랑을 하는 여자의 홍조대신 드디어 원하던 장난감을 갖게 된 아이의 흥분감이 있었다.

형이란 남자를 만났다. 키도 작고 피부도 뽀얀 게 고생을 해 본 적이 없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어딘가모르게 어수선해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짜로...

영의 선물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형에게서도 선물을 받기 시작했다. 팔찌며 반지며 목걸이... 영은 나에게 쌍으로 된 은반지와 우정을 새겨 넣은 18k 목걸이를 주었다. 싫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상우때완 달리 충고를 했다. 너무 깊이 빠지지는 말라고. 웃기만 했다.

나는 미팅을 했다. 효과는 없었다. 남자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얼음공주라는 영의 별명이 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태민이 또한 그런 나를 보고 접근하기가 겁난다고 했다. 태민과는 마주치고 싶지 않아도 별 도리가 없었다. 같은 과니깐. 하지만 난 태민과 말을 하지 않았다. 상우의 친구니 오죽할까 싶었다.

영과 형의 관계는 내가 생각했던것보다 오래 갔다. 나는 내 예감이 틀렸기를 빌었다.

내가 [향가]와 씨름하는 금요일 저녁 영이 전화를 했다. 토요일 휴가를 내서 1박 2일로 여행을 간다고. 형과 둘이서.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