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넷이서 만나자]
그렇게 해서 내 옆에도 남자라는 게 생겼다. 그러나 우린 둘다 마음이 없었고 단지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식으로 그냥 들러리마냥 옆에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내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줄이야! 그 얘기는 일단 뒤로 미루자.
영은 상우에게 헌신적이었다. 툭 하면 선물 공세라 옆에서 보고 있자니 한심하다는 생각마져 들어 한마디 했다.
[좋으니깐 뭐든 다 해주고 싶어]
열녀도 그런 열녀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영이 상우에게 애교를 떤다거나 여자 특유의 무기를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평상시처럼 다소 터프하고 낙천적으로 행동했다. 내가 남자라면 그런 강한 인상을 풍기는 여자와의 교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봤을 텐데...
영은 꾸밈이 없고 과장이 없는 여자였다. 그리고 한번 이거나 싶은 것에는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자신이 좋다 싶은 사람에겐 간이고 쓸개고 다 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우가 영의 곁에 있는지도...
라고 생각했는데...!
우리의 호프 영이 결석하는 일이 생겼다. 시험일을 채 일주일도 남겨 두지 않고 말이다. 당연히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담임이 전화를 했고 영이 몸살로 앓아 누웠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뒤통수를 치는 오싹한 무언가를 감지했다. 영이 몸살이라니! 영이 패싸움으로 몸져 누웠다면 모를까 몸살이라니!
내 예감은 맞았다.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타난 영을 보고 난 확실히 알았다.
[다 속여도 난 못 속여. 무슨 일이야?]
[미친 년...하여튼 쪽집게라니깐 별일 아니야 입시 끝나고 얘기하자]
더 묻지 않았다. 어쨌던 입시가 더 중요하기는 했으니깐. 난 그 별일이 무엇인지 알수 있었다. 상우가 개입되어 있다는 걸. 왜냐면 영의 입에서 더이상 상우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니깐. 그래도 묻지 않았다.
크게 싸웠겠지. 라고 믿었다.
문제는 심각했다. 영은 입시를 포기하고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우린 처음으로 호프집이란델 갔다. 분위기에 취해 맥주를 마셨고 영은 평소처럼 웃고 터프했다. 그런데 그녀의 눈은 울고 있었다. 그리고 영은 얘기를 하는 대신 헤어지면서 내게 녹음 테잎을 하나 건넸다.
베트 미들러의 [THE ROSE]
some say love it is a river that drowns the tender reed
어떤이는 말합니다 사랑은 연약한 갈대를 삼켜버리는 강물이라고...
이렇게 시작하는 구구절절 애절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안 봐도, 듣지 않아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단지 내가 궁금한 건 그들이 헤어진 이유였다.
노래는 앞뒷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나는 밤새도록 듣고 또 들었다.
그것이 시초였다. 남자와 헤어질때면 그녀는 내게 꼭 노래 한 곡씩 건넸다. 그 남자를 기념하기 위한 선물로 말이다.
다음 날 영이 전화했다. 만나자고. 마침 동생이 시골가고 집이 빈 상태라 집으로 오라 했다. 영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비닐봉지에는 소주 다섯병과 써니텐-그 당시 소텐이 유명했다- 두 병, 담배 두 갑, 숙취에 좋은 약, 아스피린, 껌, 과자, 과일 등등... 난 그저 한숨을 머금고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거 오늘 다 할거다 너 하기 싫음 하지마 대신 마담 노릇해라]
[얘기부터 해봐]
[짐작은 하고 있지? 상우랑 헤어졌다]
[왜?]
사내 자슥이 곱상하고 똑똑해서 좋았단다. 그런 놈이 자신을 좋아해줘서 더더욱 놈이 귀여웠고. 그래서 잘해주고 싶었고 뭐든 다 해주고 싶었단다. 언제부턴가 놈이 집까지 바래다주면서 여관 가자고 했단다. 거절했단다. 놈은 뽀뽀로 만족했단다. 그런데 만날때마다 그러기 시작했단다. 때로는 애교로 때로는 협박을, 위협을 , 사정사정...
영은 대학가면...이라고 했단다. 놈은 뽀뽀에서 깊은 키스로 가슴속으로 바지속으로 손을 들이밀기 시작했단다. 짜증나는 신경전이 시작된 것이다. 영은 상우를 놓치기 싫었다. 그렇다고 확신없는 일에 모험을 걸수도 없었다. 밀고 당기는 싸움이 오가던 중 급기야 놈이 영을 지하 주차장에서 힘으로 누른 것이다. 화가 난 영이 발로 놈을 걷어 찼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놈은 쌍욕을 하며 본심을 드러냈단다. 좋아서 만난 게 아니라 덩치 크고 터프한 여자는 만난 적이 없어 호기심으로 만났다고. 친구들과 내기했단다. 한달안에 여관 문턱을 넘을 거라고. 헌데 영이 어디 만만한 여잔가. 여자 걸고 한 내기는 져본 적이 없다는 놈이 흥정을 하자고 했고 영이 쌍욕으로 대신하자 놈은 다신 연락하지 말라며 재수없다며 돌아서더란다.
영은 온몸이 떨려 움직일 수도 없었단다.
그 첫 정을 준 남자에게서 영은 여자로서의 치욕적인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영은 울지 않았다. 쓸쓸한, 아니 몹시도 아파보이는 미소만 흘릴 뿐이었다. 나는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한숨을 끌어냈다.
[정말 좋아했는데...사랑받고 싶었는데...진짜루...]
영은 정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것도 남자에 대한 정.
그 이유는 그 다음 고백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