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경은 오디오를 껐다.
이제 그를 보낼 시간이 된 것이다. 같이 오래 앉아 있을만큼 감정이 녹녹해진 건 아니었다.
[지난 얘기들은...하고 싶지 않군요. 돌아가세요.]
낯선 타인을 대하듯 냉랭한 희경의 태도에 민규는 그저 쓸쓸한 미소만 지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민규에게도 나름대로 하고픈 말이 많았다. 듣고픈 말도 있었다. 그대로 가버린다면 다시는! 두번 다시 희경을 마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하군...8년전에도 넌 내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
[변명따윈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예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변명할 기회라도 줘 봤어? 그렇게 냉정하게 돌아설만큼 우리의 3년 세월이 너에겐 아무 의미도 없었던건가?]
그 말에 희경은 차가운 눈빛으로 민규를 마주 보았다.
[의미? 지금 의미라고 했나요? 우습군요. 그 의미를 발가락의 때만도 못하게 취급한 게 누군데! 참 쉽게도 말하는군요. 하긴 그러니깐 이 여자 저 여자 끼고 놀았죠.]
[말 조심해!]
민규의 조용하던 음성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돌아가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희경은 화가 나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혀 보는 게 얼마만인가! 예전의 민규가 그녀에게 두근거림의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화를 돋구는 대상이 되고 있었다. 화를 낸다는 건 민규에게 아직도 감정이 남아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희경은 그것이 싫은 것이다.
[돌아가요. 우리 사이는 이미 8년전에 정리가 됐어요. 그 과거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그 과거가 내게도 지옥이었어. 너보다 더했음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용서받고자 온 것이 아니야. 다만...우린 못다한 얘기가 있지 않나 싶어.]
[아니요. 우리 사이에 할 얘기란 없어요.]
[희경아...]
[가 주세요. 피곤하군요.]
희경은 일어서서 문으로 향했다. 단호한 그녀의 표정에 민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문앞에서 민규는 참으로 오랜만에 희경을 가까이서 보았다. 희경에게서 희미한 오렌지 향기가 난다고 생각한 건 착각인가?! 예전의 그녀는 늘 오렌지를 가방안에 넣고 다니면서 까먹었었다. 그래서 그 손엔 항상 오렌지향이 베어 있어 민규가 가끔 입안에 그 손을 넣고 빤 적이 많았다. 그리운 그 기억이 떠오르자 민규의 가슴 한 쪽이 즈끈.하며 아파왔다. 그 일이 그리웠다. 한 순간의 실수로 민규가 잃은 것은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후회한들...8년동안 후회한들 무엇하겠는가.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는데.
[8년만에 만나서 널 또 괴롭힌 꼴이 됐구나.하지만 이게 끝이라곤 생각하지 마라. 우린 할 얘기가 남았으니깐...다음에 보자.]
그가 나가자 희경은 보란듯이 문을 잠그고 불을 꺼 버렸다.
[다음따윈 없어...다음이란 건 없다구...]
차갑게 희경은 그렇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