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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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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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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BY ggummani 2002-04-29

수경이 언니는 추석이 되기 전에 성구네 다락을 떠났다. 표면적인 이유는 병이 너무 깊어져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데다 의사가 요양이 필요하다고 처방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수경이 언니의 병을 가장 먼저 알아 챈 사람은 윤경이 언니였다.
“내 말이 맞아, 언니. 수경이 쟤 옮는 병이야. 성구 언니야, 수경이 쟤 내 보내라.”
“니가 어째 아노? 병이 옮는 지 안 옮는 지, 니가 으사가?”
“내가 잘 알지이~~. 내가 누구유? ”
“니가 눈 줄은 내도 안다. 밀양 바닥에 내 논 날라리, 김말남이!”“그런 것 말고, 언니도 차암. 자꾸 밀양 얘기 하지 마아, 나 이제 촌년 아냐아.”
“촌년이 촌년이지. 서울 물 쪼깨 묵고 서울 말 숭내만 내믄 서울 가시나가?”
“그리고 내 이름 김윤경이야, 자꾸 말남이 라고 부르지 마.”
“문디 가시나, 부모님이 주신 이름 내 삐리고 물장사로 얻은 이름이 머 조타꼬. 아지매가 와 그래 빨리 세상을 배??겠노? 다 니 년 때문에 속이 썩어 앉아서 그랬겄지.”
“울 엄마 얘기 하지 마. 나도 속상하단 말이야. ... ... 암튼 내가 물장사 경력 십년에 별 인간을 다 만났는데, 저 병, 옮는 병이야. 내가 인천에 있을 때, 시 쓴다고 하면서 맨날 우리 다방에 와서 죽치는 남자가 하나 있었거든. 돈도 어지간히 없는 지 엽차만 시켜놓고 시 쓴답시고 하루 종일 앉았다가 저녁때쯤 되면 그냥 나가는 거야. 우리 다방에 그 날건달을 좋아해서 순정을 바친 기집애가 하나 있었거든. 날마다 밥 사 주고 술 사주고 돈까지 갖다 바쳤는데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거야. 알고 보니 그치가 저 병이 더라구. 그치 떠나고 그 기집애가 시름시름 아팠어. 알고 보니 그치에게서 병이 옮은 거더라구. 그 기집애도 얼마 못 버티고 다방 그만 뒀잖어.”

윤경이 언니의 얘기에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성구 엄마는 일단 수경이 언니를 불러 한 번쯤 말은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식구들이 모두 나간 낮 시간을 틈타 수경이 언니를 가만히 불러 앉혔다.
“니가 우리 식구들 몰리 숨카난 병이 있나? 아니, 나는 니 기분 나뿌라고 하는 소리가 아이고 니가 몸이 쫌 안 좋다카는 거는 나도 전에 부텀 알고 있었거등. 그란데 윤경이가 니 피 토하는 거를 봤다고 그라니까. 그렇나? 니 병이 그래 중하나?”
“윤경이가 제 병이 옮는 병이라고 그러던가요?”
“아니, 머 그렇다기 보다는... ...”
수경이 언니의 태도와 표정에 흐트러짐이 없자 성구 엄마는 내가 이거 실수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내 인녀느 가시나로 그마, 미안하데이, 내가 머 실수했는 갑다. 미안하데이.”
수경이 언니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 올랐다.
“괜찮아요, 언니. 언니 탓이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그렇지 않아도 이 곳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와, 참말로 병이 있나?”
“아니에요, 아픈 곳이 있기는 한데 윤경이가 말 하는 옮는다는 병은 아니에요. 제가 위가 좀 나빠요. 좀 심하게 나빠서 음식을 잘 못 먹고 조금만 기름 진 것을 먹거나, 약한 술 종류를 먹어도 잘 토해요. 심하면 피가 함께 나올 때도 있는 데, 요즈음 들어서 많이 심해져서 그런 일이 좀 잦네요. 아, 며칠 전에 한 번 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전 날 밖에서 먹은 것이 안 좋았던지 아침에 토했는데 피가 좀 많이 나왔어요. 윤경이가 일어나서 나오다가 그걸 본 것 같네요. ”
“우짜꼬,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우째끼나 안 됐다. 안즉 한창 나이에. 그래서 니 얼굴이 맨날 누리끼리하이 핏기가 없고 그렇다 그자. 무도(먹어도) 살도 안 붙고.”
“한창 나이는, 언니랑 나랑 세살 밖에 차이 안 나요. 나도 낼 모레면 서른 이구먼.”
“그래도 니는 안즉 처녀아이가. 내는 니 나이에 아 어마이 였지마는.”
“언니, 나, 곧 떠날 거에요”
“어데로 갈라꼬? 그마 여거 있어라, 내가 니 병이 낫도록 묵는 것도 신경써가 도와주고 하께.”
“아니야, 언니 꼭 떠나야 돼. 언니, 부탁이 있어요.”
“먼데, 말해 봐라.”
“언니, 나 떠나고 나면 찾아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나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요. 그냥, 모른다고만 해요. 들어 줄 수 있겠죠?”
“그래, 그거야 어려운 부탁도 아이지. 따지고 보믄 내가 니에 대하여 아는 기 머 있나? 그란데 누가 찾아 온다 말이고?”
“아무튼 무조건 그렇게 말해줘요. 나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그냥, 이 집에서 하숙하면서 그림만 그리다가 갔다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그래 줘요.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많이 아파서 의사가 요양을 하라고 해서 어디 경치 좋은 곳으로 떠났다고 그 말곤 잘 모른다고 그렇게 말 해 줘요. 꼭 부탁할게.”
“알았다. 꼭 그라꾸마, 그란데 어데로 갈 낀데? 서울에도 인자 식구도 없다카믄서.”
“갈 곳은 정해 두었어요. 추석 전에 떠날 거에요.”

수경이 언니는 정말 홀연히 떠났다. 추석을 사흘 앞둔 목요일에 나는 수경이 언니를 보기위해 성구네 집에 놀러 갔다. 그런데 다락은 깨끗이 비어 있었다. 아무런 사소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나는 다락으로 올라가 보았다. 쥐오줌 냄새는 여전하였고, 습기로 인한 벽지의 얼룩도 여전하였다. 먼지가 은하수처럼 길게 춤을 추면서 일렁였다. 연습장만 한 창문이 하나 있어 그 곳으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손바닥을 갖다 대고 바람개비나 물레방아 모양으로 생긴 그 창문을 밀어 보았다. 먼지 가득한 그 창문은 아주 조금 밀렸지만 사다리꼴로 어중간하게 걸려서 멈추어 더 이상은 밀리지 않았다. 일밀리미터 쯤 되게 열린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바람이 위나 옆이 아닌 아래에서 불어서 좀 이상했지만 나는 그 바람을 얼굴에 맞으면서 잠시 동안 엎드려 있었다.

추석 하루 전 날인 토요일, 말쑥한 양복 차림의 사람들이 성구네를 찾아왔다. 수경이 언니를 찾아 온 것이었다. 수경이 언니가 지내던 다락만이 아니라 성구네 집 자체를 아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뿐만이 아니라 우리 대문 안에 사는 일곱 가구 모든 사람들에게 한 번씩 수경이 언니에 대한 질문을 했다. 수경이 언니에게서 수상한 점을 못 느꼈는지 와 누구 이상한 사람 만나는 것 못 보았냐는 것이었다. 수경이 언니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은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수경이 언니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본 사람도 나 외에는 없어 보였다. 양복들은 어른들에게만 질문을 했지만 나는 우리 집 부엌에 숨어 혼자 조마조마 했다.

어른들 얘기로는 양복들이 찾고 있는 것은 수경이 언니가 아니라 수경이 언니가 만나던 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친구인가 후배인가 하는 사람이 수경이 언니가 만나던 그 사람에 대하여 양복들에게 나쁜 말을 하여 양복들이 수경이 언니가 만나던 사람을 찾게 되었고 그 사람을 찾기 위하여 수경이 언니를 찾아 오게 된 것이라는 얘기였다. 좀 어렵고 이해 할 수 없는 얘기여서 나는 어른들 세계는 그렇게 어렵고 이해 할 수 없는 건가보다고 생각 했을 뿐이었다. 다만 수경이 언니가 보고 싶었다. 그 뒤로 나는 성구네에 잘 가지 않았다. 수경이 언니의 다락은 윤경이 언니가 쓰게 되었고 그 곳은 담배 냄새와 화장품 냄새만 가득하여 더 이상 향그럽지도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