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짹각짹각 소리를 내며 흐른다. 시냇물처럼 졸졸거리며 먼 곳으로 여행을 가듯 미래를 향하여 쉼 없는 요동을 친다. 한 시간이 흐르면 한 시간만큼, 두 시간이 흐르면 두 시간만큼 세상은 변해간다. 봄이라면 그만큼 나무의 싹이 돋아나듯 사랑도 그렇게 커져야만 하는 데 감정의 기복은 소멸을 꿈꾸는 지 언제나 그림자처럼 뒤늦게 따라오다 조용히 눕는다.
"따르릉…따르릉"
시간은 또 뉘엿뉘엿 하루를 마감하기 위해 촐랑거리지만 사무실만큼은 너무도 조용하다. 세상은 인간에게 시기를 배우게 했듯 고요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소음이 적적한 사무실을 울렸다.
"여보세요. 이승원님 계신가요?"
"네. 접니다만."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네요. 같은 반에 있는 사람인데."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그리고 또박하게 귓가 깊숙히 작은 파열음으로 송화기를 탈출하여 승원에게로 들어왔다.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저요? 신희인이예요. 기억 못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모르실 거예요. 사람이 그렇게 많은 데, 그냥 어떻게 지내시는 지 궁금해서요. 방학중이라 학교에서 뵐 일도 없고."
그랬다. 기억이라기 보다는 아예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인식되지 않았다. 다만 개성이 뚜렷한 여자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들리고 있다는 것밖에는.
"네. 기억이 잘 나지를 않네요. 어쩌면 회사일로 밤을 지새운 탓이라 정신이 몽롱해서 일지도 모르구요."
"왜요? 집에 안들어 가셨나요?"
"네. 지금 감사준비로 바쁘거든요. 지금도 눈꺼풀이 자꾸 내려오는 군요."
"어떡하지. 내일 소모임이 있는 데, 한번 보았으면 해서 전화 드렸거든요. 안되겠군요. 감사준비중이시라니."
"아뇨. 괜찮아요. 토요일은 좀 쉬어야지요. 어디서 만나는 데요."
얼굴도 모르는, 이제 목소리만 알게된 사람. 그 사람의 모든 마력이 얇은 전화선을 통하여 최면상태로 끌어간 것처럼 승원은 다급한 마음으로 답을 던졌다. 어떤 사람일까 궁금한 마음도 더불어서.
"저 7시에 신촌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정확한 장소는 내일 전화를 드릴께요. 아직 장소까지 확정은 못 지었어요"
"네, 그러세요. 내일 전화를 주시면 나가도록 할께요."
고요했던 오후. 풀지 못한 피곤함에 하품만 연거푸 하마처럼 입을 벌리던 고요가 신희인 이라는 여자의 전화에 모두 사라졌다. 사자의 울음과 움직임에 귀를 쫑긋 세우는 초식동물처럼. 승원의 모든 감각기관은 이름 석자만 아는 그 사람에게 향해버렸다.
'신희인, 신희인, 누구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데, 궁금하다. 얼굴이 이뻤으면 좋겠는 데. 목소리는 괜찮았고, 느낌도 괜찮은 데. 궁금하다. 궁금하다.'
시간은 또 흐른다. 내일을 위해 그리고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을 밟기 위하듯 이승원과 신희인의 인연이라는 실타래의 묶임을 향하여 "짹각짹각" 템포를 잃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