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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BY 마음 2002-09-25

그가 만나자고 한 곳은 우리가 자주 갔었던 녹턴이었다.
시셀의 매혹적인 음성이 유릿문을 밀고 들어서는 날 유혹하고 있었다.
잠깐 주위를 살피는데 누군가 내 팔 한쪽을 빼낸다.
그다. 냄새 하나로도 분명 준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의 눈을 빤히 들려다 보는 일은 내겐 고문처럼 힘든 일임에도 난 자청해서 그를 불러냈다.
풀색 가디건 안에 크림색 줄무늬 남방이 그를 더욱 따뜻하게 보이게 했다.
“견딜만 하니?”
자리에 앉자마자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다.
“응......”
“여전하구나...”
“뭐가?”
“네 표정...............”
“..........”
그가 짧지만 깊은 한 숨을 토해 놓았다.
그의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이 울컥 들었지만 내 의지는 그런 것들을 잘도 참아 내 주고 있었다.
“살이 많이 빠졌구나.........”
“그래 보이니?”
“응.......”
“니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지.........”
“굳이 그 먼데 가서 그러고 있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면 그러지 마라.........”
“무슨 말이야?”
“니가 나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어야 한다면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
“꼭 그렇게 멀리 가서 얼굴 보지 않고 살다 보면 잊혀지겠지 하는 식으로 날 피해보려 했다면 내가 널 잠시 잊어 준다는 말과도 대신할 수 있어.”
“.........."
“아니 잊어준다기 보다는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안 만날 수 있다는 소리다.”
“안 만날 수도 있다구?”
“그래....... 그건 네가 원하는 거니까............”
“내가 원하면......그렇구나. 내가 원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구나.”
“말 꼬지 마!”
“알았어... 내가 원하는데로 해줘, 그럼,,,,,”
“.................”
그의 눈이 매섭게 날 노려 보고 있다.
“나 오늘, 너 집에 안 보내.....”
“무슨 말이야?”
“너 집에 안 보낸다고...”
“..............”
“니가 날 사랑하는 게 사실이라면 내 뜻대로 해줘...”
“흐흐흐........”
“비웃는 거니?”
“글쎄...”
“글쎄라니?”
“너도 별 수 없구나 싶어서......”
“................”
처음 보는 눈이다.
화가 난 걸까,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주 순간적이었지만 난 그의 눈을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고스란히 그 눈의 열기를 받아야만 했다.
사랑한다는 말, 내가 그에게 한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고 온 신경을 모아 보지만 정식으로 고백이라고 해 본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그 말이 하고 싶어진다. 지금 이 순간에....
“사랑해...........”
“.................”
그가 못 들은 걸까, 아무 반응도 없었다.
분명 그의 성격으로 봐서는 빠르고도 강한 반응을 보여 줄만 한데 오히려 이런 순간에 그는 자신을 감추어 버렸다.
그런 준우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있었다.
그를 그대로 돌려 보내야 하는 건 아닐까, 그의 뒤를 따라 나가야 하는지 마음은 따라 나가도 싶었지만 나는 전자쪽을 택했다.
그에게 줄 선물은 아직도 내손에 그대로 있는데 그는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그 고백이 그의 목을 얼마나 죄이게 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그를 얼마나 고달프게 만들지 뻔한 일이었는데도 나는 그를 무시해 버렸다.
그를 무시해 버리고 나니까 그가 앉았던 자리에서 작은 소슬바람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약간의 가벼야움, 내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더니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은 그런 기분도 들었다.
식은 커피 몇 모금으로 입안을 적시면서 천천히 지금 내가 해야하는 것들부터 생각해 보았다.
바쁠 것도 없고 집에서 만날 현화나 엄마에 대한 걱정 또한 이젠 내게서 떠나간 지 오래 된 듯 하고 정말, 나는 아무 걱정이 없는 것 같았다.
헤어지는 일이 이렇게 시원한 것일 수도 있구나, 내 머릿속에는 정말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